"브람스가 스승인 슈만의 부인 클라라를 좋아했잖아요. 브람스의 교향곡 1번에 그 스토리가 녹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1악장은 그가 20대 초반의 꽃 같은 나이에 열세살 많은 여인에게 매료된 느낌을 담고 있지요. 가슴은 쿵쾅거리며 뛰고,이뤄질 수는 없는 사랑이고,얼마나 갈등이 심했는지 1악장 선율은 기복이 매우 심합니다. 비밀스러운 사랑에 빠진 청년의 마음이죠.그러니 이 대목의 연주를 아름답거나 얌전하게만 하면 안 됩니다. 지휘를 하면서 그 부분을 강조하지요. 단원들도 금방 알아듣고 격정적인 화음을 냅니다. "

부천시향 상임지휘자이자 음악감독인 임헌정 서울대 교수(58).그는 클래식 선율과 심장의 박동소리를 대비시켜가며 얘기꽃을 피웠다. 물 흐르듯 유려하면서도 폭포수처럼 힘있는 그의 지휘 스타일을 보는 듯했다. 국내 최초의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로 한국 음악계에 '말러 신드롬'을 불러온 그는 부천시향과 함께 브람스 베토벤 슈만 브루크너 교향곡의 진수를 보여준 마에스트로.올해에는 브람스 교향곡 전곡 연주에 나선다.

"연주할 때 음표가 아니라 브람스의 마음을 보라고 얘기하죠.1악장이 그렇게 격렬한 점핑이었다면 2악장은 도무지 자기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서 종교적으로 접근하는 과정이죠.그럴 땐 단원들의 마음도 동화되고….3,4악장은 모든 것을 극복하고 난 인간의 승리 같은 느낌을 담아낸 것이지요. "

특히 우수에 젖은 목가적인 분위기를 거쳐 4악장 피날레에서 갈등을 이겨내고 강물처럼 흐르는 음률은 브람스만의 감수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브람스가 스물두살 때부터 속으로 삭이고 익혀서 마흔이 넘어서야 완성한 불멸의 교향곡.

그가 "음악은 추상적이지만 접근은 구상적으로 하는 게 좋다"고 말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올해 브람스 전곡 연주를 앞두고도 마음의 준비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제가 영적으로 충만해야 단원들을 감동시키고 청중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으니까요. 지휘봉을 흔드는 건 누구나 할 줄 알죠.문제는 감동입니다. 저는 영감을 얻기 위해 여름마다 잘츠부르크 등 명곡의 산실을 일부러 찾아다닙니다. 재작년에는 말러가 작곡하던 방을 방문했어요. 피아노 한 대와 책상 하나가 있더군요. 두 번이나 갔습니다. 현장에 가면 왠지 여기서 심포니 몇 번을 작곡했을 것 같다는 느낌이 와요. 나도 모르게 영감을 얻게 되고 그 소리가 판타지가 되지요. "

그가 했던 연주회 중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1996년 서울대 개교 50주년 기념 연주회였다.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을 때였어요. 제대로 먹지 못하고 무리하게 연습하면서 심신이 고갈됐죠.도저히 서 있을 힘이 없어서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서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온몸에 진땀이 나고 손은 잘 움직여지지 않고 비상사태였죠.아마도 그래서 가장 집중했을 거예요. 작은 움직임에도 집중적으로 빨려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이러다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러 교향곡 2번이었는데 합창단 250명의 합창 '부활하라'가 터져 나오는 순간 저도 모르게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마지막 5분을 남겨둔 순간이었죠.오케스트라 단원도 합창단도 청중도 눈물을 흘렸고 저도 울었죠."

그는 "그때 감동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도 매년 2학기 연주 때 졸업반 학생들의 뜨거운 눈물을 보면서 그날의 감격을 떠올린다고 했다. "지난해 말에는 말러 9번을 연주했는데 이 곡은 말러가 죽기 전에 쓴 곡이잖아요. 심장 박동 같은 곡인데 그런 걸 일깨우며 연주하게 하니까 학생들도 희열을 느낀다고 해요. "

그는 성장기의 추억이 음악적 감수성의 거름이라고 표현했다. "청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 누나들이 사는 곳으로 계속 옮겨 다녔습니다. 아버지가 연로해서.제천으로 이사해서 2년반 있다가 중학교는 원주에서 졸업했죠.뒷동산에 할미꽃이 있고 논도 있고,옆 집에 감나무가 있는 전형적인 시골 아이로 자랐죠 피아노가 있는 줄도 몰랐고 라디오도 없었어요. 피아노를 배운 건 열살 때였습니다. 제천 읍내 부잣집에 피아노가 딱 한 대 있었는데 초등학교 교사인 누나가 그 집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어요. 나중엔 누나가 피아노를 한 대 마련해서 마음껏 칠 수 있었죠.어린 시절에 레슨받지 않고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던 게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

서울로 옮겨 대광고등학교를 다니던 그는 신학대학에 가려던 마음을 내려놓고 누나의 권유로 서울대 작곡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미국 줄리아드와 매네스음악대학원 작곡과를 마치고 1985년 서울대 교수로 부임했다.

"지휘를 하면 할수록 음의 세계는 누가 가르쳐줘서 느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음악은 가르칠 수 없지요. 학생들에게도 스스로 배우라고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는지 보고 배우라고.직접 먹여주려고 해도 할 수가 없죠.게다가 예,아니요로 답을 요구하지 말라고 하지요. 예술에서 맞고 틀리는 것은 없잖아요. "

그는 "우리나라에 뛰어난 연주자들이 많지만 이젠 솔리스트보다 오케스트라 위주로 한 단계 성숙한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얘기했다. "어린 연주자들 중에서도 대단한 아이들이 많습니다. 부모들의 열정도 톱 클래스죠.교수진 또한 세계적입니다. 이제 우리나라 클래식 교육은 오케스트라 중심으로 가야 합니다. 미국 독일 대학이 지금 그렇게 가고 있어요. 솔리스트가 아닌 오케스트라 중심 교육,아직 준비가 덜 됐지만 곧 해야 합니다. 개인은 훌륭하지만 오케스트라 저변이 취약하다면 문화 선진국이라 할 수 없지요. "

부천시향도 지금은 단원이 70명이 넘고 웬만한 곡은 다 할 수 있지만 말러 교향곡 등 큰 편성은 완전하게 안 된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외부에서 객원연주자들을 초빙해 호흡을 맞추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20여년 전 쥐가 돌아다니는 곳에서 힘겹게 연습하던 것과 비교하면 참 좋아졌다고 그는 말한다.

"처음에는 연습실이 없어서 복도에서 했죠.제가 30대였으니까 팔팔했지요. 그런 상황에서도 단원들이 정말 열심히 했어요. 나날이 성장했죠.그러다 1990년대 초 예술의전당의 교향악 축제 2회 때 참여 요청이 왔어요. 더 죽어라 연습해서 나갔는데 '대한민국 음악계가 놀랐다'는 소리를 들었죠.어떻게 그렇게 잘 하느냐고.기대도 하지 않았던 팀이라고….그때 전국적으로 알려졌죠."

그는 1989년 부천시향 지휘를 맡은 이후 22년이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국내 상임지휘자 연임 최장기록이다. "저도 20주년이 되면 전용연주홀이 완성되는 것을 보고 떠나겠다고 공언했죠.다른 심포니들의 러브콜도 있었고요. 그런데 아직 착공도 못했어요. 원래 2009년에 완공 계획이었는데….돈이 많이 든다고 합니다. 최소한 1100억원 정도.지금 시민회관으로는 부족하지요. 전용홀을 짓겠다는 부천시의 의지는 강합니다. 하지만 지역 정서와 다양한 의견들을 모으다보니 아직 장소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지요.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멋진 곳이 있구나 싶은 홀이 완성되면 그때 다시 새로운 음악의 세계를 향해 저는 떠나야지요. "

만난사람 = 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