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했네요. " 러시아 취재 가이드를 맡은 현지 유학생 황인욱씨는 기자에게 연신 사과의 말을 건넸다. 투자전문회사 메트로폴IFC에 가야 하는데 대형 쇼핑센터인 메트로폴리스로 잘못 안내해 인터뷰가 무산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오피스동과 함께 최근 들어선 메트로폴리스가 워낙 인기를 끌다 보니 당연히 이곳에 입주한 회사라고 생각했습니다. "

황씨는 요즘 외신을 달구는 '미녀 스파이' 안나 채프먼의 모교인 명문 민족우호대에서 치의학을 공부하고 있다. 엘리트인 그의 어처구니없는 실수에서 러시아의 소비 열기와 경기 회복을 실감하게 된다.

◆성장궤도에 복귀한 러시아 경제

상당수 한국인에게 러시아는 여전히 '동토의 땅'으로 관심 밖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정치적 영향력 외에 경제적으로도 이미 대국이다. 작년 1~9월 무역수지 흑자가 1092억달러에 달하고 외환보유액은 4800억달러로 중국 일본에 이어 세계 3위다.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11위권이다. 잠재력은 더 크다. 세계 최대 영토와 풍부한 자원을 가졌고 인구도 1억4100만명으로 유럽에서 가장 많다. 영향력이 미치는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등 옛 소련지역의 독립국가연합(CIS) 국가들을 포함하면 3억명의 거대 경제권이다.

러시아 경제는 회복세가 완연하다. 마크 루빈스타인 메트로폴IFC 수석연구원은 작년 경제성장률을 4% 이상으로 추정했다. 최용권 한국수출입은행 모스크바사무소장은 "딱히 높은 수준은 아니지만 산업생산이 7% 이상 늘어 의미있는 반등"이라고 평가했다.

'모스크바 국제 비즈니스센터'(일명 모스크바 시티)가 연초부터 공사를 재개하는 데서도 부활의 조짐을 확인할 수 있다. 모스크바 시티는 '미래를 지향하는 러시아의 상징'으로 불리는 120억달러짜리 초대형 프로젝트다. 뉴욕 맨해튼,런던 카나리 워프 등 글로벌 금융중심지를 본떠 1992년 착수했다. 이미 10여동의 고층 빌딩이 세워졌지만 경제위기 여파로 2009년 하반기부터 공사가 전면 중단됐다.

이곳에 러시아 최대 민간은행 알파뱅크가 10여일 전 자금 지원을 약속했다. 1년6개월 만에 포클레인과 기중기가 다시 움직이게 된 것이다. 이현수 기업은행 모스크바사무소장은 "갖은 어려움 속에 키를 높여가는 마천루들이 경제대국으로 한발 한발 올라서는 러시아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듯하다"고 말했다.

주가도 경기 확장세를 반영하고 있다. 2009년 초 500선 밑으로 추락했던 RTS지수는 3배 넘게 올라 1800선 회복을 노리고 있다. 나탈리아 올로바 알파뱅크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주가수익비율(PER)이 9배로 브라질 13배,중국 16배,인도 19배보다 여전히 낮다"고 진단했다.

◆'자원의 저주' 풀고 경제대국 꿈꿔

러시아 경제는 위기 전인 2003~2007년 연평균 7%씩 성장했다. 고유가 덕이었다. 원유 천연가스 등 에너지가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0%를 오르내린다. 하지만 에너지자원 의존형 경제는 글로벌 경제위기로 유가가 급락하자 곤두박질쳤다. 2009년 성장률은 -7.9%로 최악이다.

이종구 주러시아 한국대사관 공사는 "자원은 러시아에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극복해야 할 저주라는 인식이 이때부터 생겨났다"고 전했다. 매장량 세계 1위인 천연가스와 7위인 원유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야 경제대국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2009년 11월 국정연설에서 △혁신형 제조업 육성 △러시아판 실리콘밸리인 스콜코보 혁신센터 건립 △외국인 직접투자(FDI) 유치 등을 통한 경제 현대화를 천명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정경회 주러시아 재경관은 "거대한 항공모함이 방향을 새로 설정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메드베데프 대통령 방한 시 '한 · 러 협력 MOU'에 서명하면서 한국은 러시아 경제 현대화의 첫 번째 아시아 파트너 국가가 됐다"며 "에너지 자원을 포함해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 프로젝트를 발굴 중"이라고 말했다.

모스크바=백광엽 기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