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문인이자 평론가인 오스카 와일드가 비평가를 옹호하는 글을 썼죠.비평이야말로 고도의 창작이며 비평가가 열등하다는 말은 거짓이라고.그런데 솔직히 시(詩)가 더 쓰기 어렵긴 했어요. 자신의 밑바닥을 다 보여줘야하고 단순한 고백에 그쳐서도 안 되니까요. 시를 쓰는 이유를 정말 많이 생각했습니다. "

문학평론가이자 국문학자인 방민호 서울대 교수(45 · 사진)가 첫 시집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실천문학사)를 펴냈다. 1994년 제1회 '창작과비평' 신인평론상을 받으며 등단한 그는 평론집 《비평의 도그마를 넘어》 《문명의 감각》 《감각과 언어의 크레바스》 등을 냈다. 시는 대학원 시절부터 쓰기 시작했고 2001년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을 받으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이후 10여년간 차곡차곡 쌓아온 시 65편을 골라 시집으로 엮은 것.'시인 방민호'로서의 명징한 걸음이다.

그는 "제게 시는 괴로움을 해결하는 방식이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대화 창구"라며 "비평으로 할 수 없는 더 깊은 차원의 대화를 하면서 시를 예술작품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평론가로서 명성이 쌓일수록 시를 세상에 내놓기가 부담스럽기도 했을 텐데 그는 태연하다. "뭘 하든 몰두하는 타입이라 부담스럽게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시로 평가받으며 헤쳐나갈 자신이 있었다고 할까요. 내심 '나는 본격적으로 하고 있다'고 되뇌었죠."

그의 시는 간결하다. 운율도 좋다.

'말아/ 쓰러진 말아/ (중략) 달리길랑 그만두고/ 섬기길랑 그만두고/ 연한 풀밭에서/ 예쁜 동무 만나/ 사랑 나누렴.'('말' 부분)

'곱게 잠든/ 당신의 머리카락 바람에 날려// 가느다랗고 긴 당신의 머리카락 바람에 날려// 구만리 허공타고/ 나 이렇게 서 있는 바닷가로 날려,날려 와// 신기한 요술/ 혀 날름거리는 흰 뱀 되어 튀어,튀어 올라.'('파도' 부분)

색상과 감촉 등 오감(五感)에 대한 묘사도 생생하다. '내가 눈 떴을 때 당신은 검은 머리 빗어 내리고 있었지 늦은 아침이었을까 정오였을까 당신 긴 등허리가 희게 빛나던 그때 당신 떠나고 난 뒤 꼬리 긴 뱀이 벗어놓은 허물처럼 부드럽게 구겨져 있던 회록빛 얇은 명주이불 그리운.'('그때' 부분)

국어사전에는 없는 '회록색'이란 조어에 대해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느낌에 (독자들이) 가장 근접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쓰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시가 원래 노래에서 나왔잖아요. 운율에 내용을 담으면 전달력이 높아지죠. 같은 마음이라도 리듬에 담을 때 맛이 달라지잖아요. 시어 선택에도 더 공을 들이게 되고…."

시집은 4부로 구성됐다. 1부에는 사랑하는 감정을 노래한 연시들을 모았다. 2부는 현대 도시 문명 속의 물상들과 여행,음악,영화 등에서 얻은 영감을 다룬 것.3,4부는 자신의 인생관이나 타인과의 교류를 주제로 삼았다.

처연하면서도 쓸쓸한 감성이 주를 이루지만 의외의 재미와 따뜻함도 녹아있다. 어느 개그맨의 멘트를 연상시키는 '무려 십육 년 동안/ 한 번도 눈 깜박이지 않은 달인처럼'이나 반창회에서 만난 친구들을 러시아 마주르카 인형(겹겹이 쌓인 인형)에 비유한 대목 등이 미소를 머금게 한다.

그는 "개체가 개체를 넘어 다른 존재들과 만나는 가장 근본적인 양식이 시인 것 같다"며 "개체성 혹은 개별성이 보편성을 향해 수직상승하고 결국 딱 맞붙는 상태를 지향하며 시를 쓴다"고 말했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