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도시락을 담은 가방을 왜 그리 따라다니던지."

그린스펀 전 FRB 의장은 2007년 발간한 회고록 '격동의 시대:신세계에서의 모험'에서 일화 한토막을 소개했다. 2000년을 전후해 닷컴 붐이 절정을 치달을 때,미국 CNBC방송은 서류가방지표(briefcase indicator)를 고안해냈다. 이 지표는 옆구리에 낀 그린스펀 당시 의장의 서류가방이 홀쭉하면 경제에 별 문제가 없다는 의미이고,가방이 터질 것처럼 꽉 차 있으면 금리가 치솟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로 통했다. 그린스펀은 하지만 "서류가방지표는 전혀 맞지 않았다"며 "서류가방이 불룩했던 것은 순전히 점심 도시락 때문이었다"고 익살스럽게 실토했다. 금리정책 방향을 놓고 시장과 소통하는 그의 정교한 수사법과 더불어 서류가방도 '그린스펀 신화'를 구성하는 한 요소였다.

유대계인 그린스펀은 어려서부터 숫자에 밝았다. 월가 주식 중개인이던 부친은 아홉 살 때 그에게 대공황 종료를 알리는 저서를 건네주고선 연구할 것을 주문했다. 그린스펀은 아버지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줄리아드음대에서 클라리넷을 1년간 공부하다 중퇴한 뒤 클라리넷과 색소폰을 불며 전문 재즈밴드 활동을 했지만 결국 뉴욕대 경제학과에 진학해 학사,석사,박사학위를 땄다.

계량경제학에 눈을 뜬 그린스펀은 정부 업무에 발을 들여놓기 전 타운센드 그린스펀 경제컨설팅 회사를 운영해 만족할 만큼의 부(富)를 쌓았다. 한창 잘 나가던 철강산업을 분석한 덕분에 1958년 불경기를 경고할 수 있었다고 그린스펀은 회고했다.

그는 이런 재능을 바탕으로 리처드 닉슨,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도왔다. 그를 폴 볼커 후임으로 FRB 의장에 앉힌 사람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었다. 그린스펀은 이어 조지 H 부시,빌 클린턴,조지 W 부시 전 정부 아래에서 18년6개월 동안(1987~2006년) FRB 의장을 지냈다.

그린스펀이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6 · 25전쟁 때부터다. 미국 국방부가 추진한 프로젝트에 참가해 한국전에 투입할 전투기와 폭격기 대수 등을 분석하는 작업을 했다. 1997년 여름 또 한번 한국과 인연을 맺는다. 태국에서 불붙은 아시아 외환위기가 북상하기 직전이었다. 그는 11월 일본은행 고위 관계자로부터 다급한 전화 한통을 받았다.

그린스펀은 "일본은행 고위 관리가 댐이 무너지려 하고 있다며,다음 차례는 한국이 될 것이라는 점을 FRB가 경고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혔다. 그는 "아시아의 괄목할 만한 성장의 상징인 한국은 세계 11위 경제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충격적이었다"고 술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