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2일이면 한일 강제병합 조약이 체결된 지 꼭 100주년이 된다. 해방 이후 우리는 극일(克日)을 다짐하며 쉴 새 없이 달려왔다. 그 성과는 과연 얼마나 될까.

한국경제신문과 요미우리신문이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계기로 양국 기업인 100명씩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극일을 위한 노력이 어느 정도는 결실을 맺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일본기업인들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의 경쟁력을 높이 사며 라이벌 기업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이건희 삼성 회장,정몽구 현대차 회장 등의 강력한 리더십과 스피디한 경영판단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우리 기업들이 세계시장을 누비며 내로라 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때문일 것이다. 식민지 지배와 한국전쟁,그로 인해 폐허의 처지에 빠졌던 과거사를 생각하면 괄목할 만한 결과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나라 경제 전체적으로 따져도 일본 따라잡기에 성공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대답은 '천만에'다. 국내총생산(GDP) 국민소득 같은 것들을 복잡하게 따져볼 것도 없다. 두 나라 돈의 상대적 가치가 어떻게 변했는지만 살펴봐도 그런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한국은행의 온라인 경제통계시스템(ECOS)이 원 · 엔 환율에 대한 자료제공을 시작한 1977년 4월1일의 두 나라 돈 가치는 100엔당 174.50원이었다. 이것이 80년대 초엔 100엔당 200~300원대, 80년대 후반엔 400~500원대, 90년대 초반엔 500~800원대, 90년대 후반엔 700~1300원대를 각각 형성했다. 2000년대 들어선 초반엔 900~1100원대,후반엔 700~1600원대를 오르내렸다. 올해의 경우는 대체로 1100~1300원대를 나타냈고 요즘은 100엔당 1360~1380원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90년대 후반 환율이 비정상적으로 솟구친 것은 외환위기 때문이었고 2000년대 후반의 환율 급상승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이런 돌발 변수들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원화 가치가 줄기차게 뒷걸음질해왔음이 한 눈에 드러난다. 지금의 원화 가치는 1977년 4월에 비한다면 대략 8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돈의 가치는 기업경쟁력 등 나라 경제의 전반적 측면을 축약하는 것이고 보면 참으로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엔화가 달러 등 다른 나라 통화에 대해서도 강세를 보여온 것은 사실이다. 일본의 무역흑자가 누적되면서 주요국들이 엔화를 절상시키기로 의견을 모은 플라자 합의(1985년 9월22일) 등이 큰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같은 기간 달러화의 대 엔화 가치는 3분의 1 정도 수준으로 내려앉는 데 그쳤다. 원화 가치 하락폭이 지나치게 크다는 뜻이다.

우리 경제가 지금까지 환율 상승에 의존해 굴러왔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원화가치 하락이 수출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을 밀어올리고 이를 통한 수출 확대가 경제를 지탱하는 버팀목 역할을 해온 셈이다. 세계경제위기의 와중에서도 수출이 호조를 보이고 큰 폭의 무역흑자를 이어가고 있는 것도 환율 상승에 크게 힘입은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뒤집어 말하면 환율의존형 구조에서 탈피하는 일이 우리 경제의 시급한 과제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돈의 가치 변화로 볼 때 일본 경제의 경쟁력은 우리의 그것을 훨씬 앞선다. 무려 20년에 걸친 장기불황 기간 중에도 원화 대비 엔화 가치는 2배로 뛰었다. 막걸리 한 통을 달랑 100엔짜리 동전 한 개로 살 수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도 요즘 우리나라에는 '일본은 이미 한 물 간 나라'라며 업신 여기는 경향이 만연해 있으니 우려스럽다. 자신감을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자만심은 곤란하다. 우리의 일본 따라잡기는 아직도 한참 멀었다. 한층 더 분발하고 한층 더 열심히 뛰어야 한다.

이봉구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