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점심시간‥먹고 싶은 것 말하라기에 '돈가스' 했더니…"눈치도 없냐"
오전 11시 50분.김 과장의 행복한 고민이 시작된다. '자장면? 설렁탕? 부대찌개? 아님 구내식당? 콩국수?'

머릿속에 온갖 메뉴판이 주렁주렁 열린다. 하지만 오늘도 어김이 없다. 먹을게 없다. 구내식당은 갈수록 기름기가 줄어드는 눈치다. 오늘만큼은 '짬밥'사절이다. 회사 주변은 순례가 이미 끝난 터다. 고민끝에 메신저로 이 대리를 호출한다. '자장면 시켜놓고 스크린골프를 한판 할까? 내기 당구를 한판 칠까?'일단 만나고 보잔다.

사무실 분위기를 탐색한다. 슬슬 시계를 흘끔거리는 박 팀장이 포착된다. 자리를 떠야할 때다. 자칫하면 붙잡힐 수 있다. 잡히면 끝장이다. 퀴퀴한 순대국 아니면 시큼한 김치찌개가 불보듯 뻔하다. 성질이 급한 박 팀장의 식사시간은 딱 10분.자칫하면 체할수 있다.

하지만 아뿔사.회사 정문을 용케 빠져 나왔다 싶은 순간,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박 팀장이다. "어이 김 과장 이 대리 오늘 순대국 어때?" 망했다. 하지만 어쩌랴! 식사도 정치라는 데.김 과장 이 대리 꾹 참고 이구동성으로 "순대국 좋죠!"를 외친다. 점심값 굳히는 게 어디냐고 위로하면서 말이다.

◆30초 스트레스!


'점심메뉴 고르기'.직장인들에겐 어려운 숙제다. 팀을 위해 메뉴를 골라야 하는 신입사원들에게는 또다른 스트레스다. 평가를 받는 느낌이 들어서다. 팀장이 "뭐 먹을래?"라고 물어 쭈뼛거리거나 "아무거나요"라고 하면 "넌 주관도 없냐"는 핀잔이 돌아온다. 다음날,"일본식 돈가스 어떠세요?"라고 소신껏 외쳤더니 "눈치없기는,어제 술 먹은 거 몰라?"라고 면박을 준다. 메기 매운탕이나 먹으러 가잔다. 차라리 물어보지를 말던가. 점심마다 모래를 씹는 것 같다는 게 공기업 입사 6개월차 강민교씨(28)의 말이다.

이 정도는 애교에 속한다. 식습관 변경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수도 있다. 입맛 까다로운 상사를 둔 중견기업 나모대리(32)의 경우다. 그의 팀장은 채식주의자다. 육류는 입에 대지도 않지만 생선은 먹는 이른바 '페스카테리언(pescatarian)'이다. 나 대리는 정 반대다. 고기라면 사족을 못쓴다. 그러나 팀장 때문에 매일 생선이 들어간 찌개나 초밥,파스타 등을 먹어야 한다. 팀장은 언제나 "신경쓰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눈치없이 고기메뉴를 고르는 날엔 어김없이 복수가 돌아온다. 저녁 늦게까지 자리를 지키고는 "먼저 퇴근하라" 소리를 끝끝내 안하는 게 그의 특기다. 저녁 회식 때도 마찬가지.횟집-조개구이집-생선구이집의 반복이다. 그는 "생선을 하도 먹어서 아가미가 생길 것 같다"고 손사래를 친다.

◆업무얘기는 그만!


중견기업에 다니는 정진수 과장(34)에게는 점심시간 수칙이 몇 개 있다. 우선 '점심 회식은 사절'이다. 오후에도 일이 쌓여 있는 만큼 잔소리를 들었다간 하루업무를 망치기 십상이기 때문.먹는 기쁨은커녕 스트레스만 곱빼기로 늘어나는 상황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점심시간이 되면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잔머리를 기꺼이 굴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두 번째 수칙이 팀장과 떨어져 앉기다. 식사 때면 꼭 '업무 얘기'를 꺼내는 팀장과의 식사자리는 위치마다 급수가 매겨져 있다. 맨 구석 자리가 'R석',팀장 옆 라인이 'A석',팀장과 마주봐야 하는 줄은 'B석',팀장과 바로 마주 봐야 하는 자리는 '입석'이다. R석을 차지하기 위해 그가 주로 쓰는 방법은 화장실 다녀오기나 담배 사오기다. 보통 가운데부터 자리가 하나씩 채워지기 때문이다. 화장실을 다녀오면 맨 구석 자리는 떼어 놓은 당상.물론 위험도 감수해야 할 때가 있다. 끝부터 자리가 채워질 수도 있어서다. 팀장이 '진상'일 경우다. 자칫하면 팀장 바로 옆 혹은 앞에 앉는 비극(?)도 종종 벌어진다. 정 과장은 "확실하게 위험을 헤지할 수 있는 게 전화받기"라며 "거래처 등 중요한 전화를 받는 척하며 3~4분을 쓰면 '희생양'이 이미 정해진 뒤일 경우가 많아 R석을 차지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이맛에 산다!


화장품 회사의 박 모 과장(36)은 점심시간 20분 전이 되면 차 모 과장(34)과 사내메신저를 가동한다. "샌드위치랑 스타 한판?" "오케이!".누가 볼 세라 짧은 단문의 대화가 끝나고 정오가 되면 부리나케 편의점으로 향한다.

둘은 샌드위치와 바나나우유를 사들고 PC방으로 들어가 스타크래프트에 열을 올린다. 점심시간이 1시간30분이면 딱 좋으련만,45분간만 게임하고 1시간 정액요금을 내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스타'를 즐기고 들어오면 오전에 쌓인 스트레스가 싹 사라진다.

여성 직장인들 중에는 점심시간을 '미용시간'으로 쓰는 경우도 꽤 있다. 점심을 굶고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거나 네일케어,피부관리를 받는 것이다. 심지어 성형도 점심에 가능하다.

대기업에 다니는 이모 대리(여 · 31)는 "볼이나 이마를 도톰하게 한다거나 입가의 팔자주름을 없애는 '프티(petit) 성형'은 4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 대부분 점심시간을 활용한다"고 말했다. 그는 "여성 동료들 사이에 소문이 나면 너도나도 점심시간에 '그곳'에 다녀오게 된다"고 귀띔했다.

미처 감지 못하고 온 머리를 감으러 점심시간에 미용실을 찾는 직장인들도 있다.

◆자투리 시간도 쓰기 나름


대기업에 근무하는 강모씨(29 · 여)는 사내연애 후유증을 점심시간 활용으로 극복한 경우다. 같은 부서 동기와 일종의 '내부자 거래'로 뜨거운 눈빛을 주고 받으며 감정을 키워오던 강씨.남친이 옆 부서 여자후배와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큰 충격에 빠졌다. 결국 남친이 여자후배를 택하자 자존심까지 산산조각났다. 얼굴이 두껍지 못해 더 이상 동기와 얼굴을 맞댈 수 없었던 강씨에게 전 부서원이 우르르 함께 나가 먹는 점심은 고문이나 매한가지였다.

결국 강씨는 "요즘 체력이 달려 점심시간에 운동을 하려 한다"고 부서장에게 핑계를 댄 후 점심시간에 운동에만 매진했다. 식사는 요구르트 한 병.석 달을 넘긴 강씨의 몸매는 놀랄 만큼 날씬해졌다. 러닝머신 위에서 들끓는 감정을 정리한 것도 수확이었지만,무엇보다 달라진 몸매에 대한 칭찬이 쏟아져 흐뭇했다.

강씨는 "비록 동기가 나에게 다시 돌아온 건 아니지만 석 달이 지난 후에는 동기와 그럭저럭 말을 섞을 정도까지 담담해졌다"면서 "실연이 가고 몸매가 온 격"이라고 말했다.

이관우/이정호/김동윤/이상은/이고운/강유현/강경민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