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사업은 '반대의 역사'] 경부고속도로 계획에 "달릴 車도 없는데…부유층 유람 길"
"한국의 모든 차들을 줄세워 봐야 경부고속도로를 못 채울 것이다. 팔과 다리가 말라버린 기형아다. "

1967년 4월27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6대 대선 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발표하자 야당의 유력 정치인은 이 같은 이유를 내세워 반대했다. 야당만이 아니었다. 여당과 심지어 정부 관련 부처들마저 반기를 들었다. 언론도 부정적이었다. 총 공사비 429억7300만원으로 그해 국가 예산의 23.6%를 차지한 만큼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다. 그렇지만 1970년 준공 당시 1일 통행량이 1만대에서 지난해 103만여대로 104배나 증가하는 등 경부고속도로는 한국의 경제발전과 산업화의 상징이 됐다.
[국책사업은 '반대의 역사'] 경부고속도로 계획에 "달릴 車도 없는데…부유층 유람 길"
◆정부마저 반기

1967년 11월7일 정부 여당(공화당) 지도부는 연석회의를 열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확정했다. 그렇지만 당정 지도부의 결정 사항에 대해 공화당과 경제기획원,재무부가 반기를 들었다.

공화당은 재정에 무리가 간다며 시기상조라고 비판했다. 경제부처는 재정 파탄을 들어 반대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주도했던 주원 건설부 장관은 "'주원이라는 자가 너무 설쳐댄다,혼자서 날뛴다'고 하는 얘기가 들렸다. '그러니 갈아치워야 한다'고 고위층에 바람을 넣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런 비난들로 인해 주 장관은 고속도로 건설사업 과정에서 예산 당국과 미리 절충하고 경제기획원을 거쳐 청와대로 최종 결재를 받으러 가는 게 아니라 대통령의 양해부터 미리 받아내 그 증표를 호주머니에 넣고 경제기획원으로 향하곤 했다. 건설부로서는 대통령 이외에 의지할 곳이 없었다.

◆건설 현장에 드러누워 반대

야당의 반대가 가장 거셌다. 표를 얻기 위한 선심성 정책이라고 공격했다. 1967년 대선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건설 반대에 매달렸다.

우선 서울과 부산 간 복선 철도가 있는데 다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것은 중복투자라고 비난했다. 수도권과 영남권 등 일부 지역에 발전과 특혜를 부여한다는 지역편중론을 꺼냈다.

신민당 의원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가뜩이나 전라도에서 현 정권에 대해 불만 운운하는 이때에 같은 국토 내에서 어찌하여 한쪽은 철도 복선화가 있는 곳에 다시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파행을 하는가"라며 "고속도로를 만들어 봐야 달릴 차가 없다. 부유층을 위한 호화시설이 될 뿐"이라고 말했다.

유진오 신민당 당수는 "독재자 히틀러의 그 유명한 아우토반을 연상했다"며 "아우토반은 경제적인 의미보다 군사적 의미가 더 컸지만 자고로 독재자는 거대한 건조물을 남기기를 좋아한다"고 날을 세웠다.

야당 의원들은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 드러누워 "우량농지 훼손이 웬말이냐,쌀도 모자라는데 웬 고속도로냐,부유층 전유물인 고속도로 건설 끝까지 결사 반대"라는 구호를 외쳤다.

야당은 이와 함께 고속도로 건설사무소의 소장을 1급 공무원으로 임명했는데,이들을 감독하는 건설부의 국토보전국장은 2급이어서 감독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는 비판을 했다. 서울~수원 간 공사는 예산도 없고 국회에 보고 없이 착공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언론 · 학계도

언론은 다소 조심스런 태도를 취했다. 다만 고속도로 건설이 경제 발전에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문제점을 제기했다.

A일보는 "대도시에 생산 · 서비스 시설이 집중돼 중소도시는 대도시에 눌려 퇴색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B일보는 "서울 부산의 2대 도시 대자본가가 중소도시에 침투함으로써 중소도시의 경제가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며 "지방 상공인 육성은 물론 독점 자본가의 출현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의 모 대학 C교수는 "자동차와 석유 수요의 증가는 수입 수요를 유발하고 관광자원 개발은 돈 많은 도시민의 주말여행 코스로 전락돼 소비성향을 조장할 수 있다"는 등의 이유를 대며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홍영식 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