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리는 실수의 달인이다. 그의 덜렁증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내 최고다. 하지만 덜렁이 이 대리도 억울할 때가 있다.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것까지 이 대리의 실수인 척 하고 넘어가는 동료들 때문이다. 동료가 깜빡한 자료도,상사가 누락한 보고서도 모두 이 대리 탓이 된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별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일을 그르친 '주범'으로 몰린 경험이 한두 차례씩 있게 마련이다. 후배일수록,내성적일수록,만만할수록 '희생양'을 찾는 동료들의 일점사(一點射 · 하나의 목표물을 향한 집중 공격) 대상이 되기 쉽다.

문제는 직장이 법원이 아니라는 것.공정한 판관을 만나 잘잘못을 명명백백히 가려 달라고 할 수도 없다. 친한 동료에게 억울함을 하소연할 때도 있지만 어쩐지 좀스러운 짓인 것 같다. 듣는 상대방도 '정말?'이라며 반신반의하는 눈치다. 나만 바보되는 분위기다. 결국 억울함을 속으로 삭이고 마는 것이 대부분의 김 과장,이 대리들이다.

◆선배 잘못 만난 결과치고는…

전시기획 전문업체 사원이던 박모씨(32)는 무능한 상사를 모신 죄로 프로젝트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회사를 그만뒀다. 박씨의 팀장은 회사 내에서 '마이너스의 손'으로 불렸다. '미다스의 손'이 아니다. 손 대는 족족 일을 망친다는 뜻에서 붙은 별명이다. 모두가 신뢰하지 않았지만 박씨만큼은 초년병 시절 그를 챙겨줬던 팀장을 따랐다.

작년 가을,팀장은 그에게 대형 전시기획 프로젝트팀에 들어오라고 제안했다. 승진 시기를 앞두고 '한 건' 하고 싶던 그는 냉큼 수락했다. 하지만 상황판단이 더디면서도 고집이 센 팀장 탓에 일은 자꾸 꼬여만 갔다. 전시회 참가를 승낙했던 업체들조차 팀장과 불화를 빚다가 떠나갔다. 박씨가 하루에 서너 곳의 업체를 방문하며 참가를 호소했지만 소득은 크지 않았다.

묵묵히 팀장의 삽질을 수습하던 박씨는 '내 고통을 언젠가 누군가는 알아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회사는 냉정했다. 전년 대비 3분의 1 규모로 쪼그라든 행사에 대해 최악의 평가를 내렸다. 박씨는 동기들이 그를 빼고 전원 승진하는 꼴을 봐야 했다. 분을 삭이다 못해 사표를 낸 박씨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팀장의 잘못을 낱낱이 까발리며 내 탓이 아니라고 호소할 걸 그랬다"며 "의리는 조폭영화에서나 미덕일 뿐이었다"고 푸념했다.

◆잘못은 모두 부하탓?

대기업 정보기술(IT)계열사에 다니는 김유선씨(30)는 사수에게 배신을 당했다. 김씨의 사수는 임원과 거래처 간 중요한 식사 약속을 잡기로 해 놓고 까맣게 잊었다. 이 사실을 당일에야 알게 된 임원은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죄송하다"며 굽신대는 사수의 뒷모습을 보며 김씨가 고소해 한 것도 잠시.사수가 임원에게 "유선씨가 연락을 하기로 해 놓고 그만 잊은 모양인데,잘 챙기지 못한 제 탓"이라고 변명하고 있는 게 아닌가. 김씨는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며 "따지려 했지만 이런 철면피에게 뭐라 해 봤자 씨도 안 먹힐 것 같아 참고 말았다"고 전했다.

◆사생활 오해는 괴로워

벤처기업에 다니는 윤현미씨(여 · 34)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자를 꼬셔서 명품가방을 얻어낸 후 차버린 악녀' 타이틀을 단 적이 있다. 문제는 그런 소문을 퍼뜨린 것이 집 앞에 차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거나 선물공세를 펼치며 그를 몇 달간 쫓아다녔던 회사 사수였다는 점.사수는 툭하면 단둘이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졸라댔다. 윤씨가 거절하면 벌컥 화를 냈다.

이렇게 시달린 지 몇 달,윤씨는 한 회사 선배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너 아무개씨가 명품가방까지 사줬는데 받기만 하고 무시했다며?" 윤씨의 완곡한 거절을 무시하고 혼자 열을 냈던 사수는 결국 앙심을 품고 사내에 이상한 소문을 냈던 것.소문에 따르면 윤씨는 아침 출근길마다 대기하고 명품 선물을 하던 사수의 순정을 짓밟은 '악녀'가 돼 있었다. 윤씨는 "사수는 한참 추근덕대다가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면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게 특기였다"며 한숨을 쉬었다.

◆오너아들이 아닌데…

대기업 L사에서 일하는 홍모 대리(32)는 최근 두 달 동안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회사를 그만두고 언론사로 옮긴 전 동료에게 회사 기밀을 누설했다는 의심을 받은 것.기밀 내용이 담긴 언론보도가 나오자 정보유출자를 색출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기자와 절친관계였던 홍 대리가 조사대상에 올랐다. 홍 대리는 "나는 정말 아무 말도 한 게 없다고 아무리 부인해도 직속 상사와 인사팀이 수시로 불러내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괴로웠다"고 회상했다.

국내 한 중견기업에 근무하는 방모씨(30)는 성씨 때문에 회사에서 오해를 당한 경험이 있다. 입사 직후부터 동료들이 어색하게 대하는 것을 느꼈지만 '친해지지 않아서 그렇겠지'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나도록 사람들과의 벽을 걷어내지 못했다. 의아해진 그는 상사에게 상담을 신청했다. 이유는 엉뚱한 데 있었다. 자신의 성씨와 오너 일가의 성씨가 같아서 사람들이 자신을 '로열 패밀리'로 오해한 것.방씨는 "그 다음부터 동료들이 자꾸 '무늬만 방'이라고 부른다"고 전했다.

◆당신 잘못이라면 기꺼이

억울한 누명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론 기꺼이 누명을 자청하기도 한다. 사랑,의리 등 이유는 다양하다. 대기업 S사에서 일하는 4년차 김정수씨(33)는 같은 팀 동료와 비밀 사내연애 중이었다. 하루는 사장 앞에서 발표를 하고 돌아온 팀장이 팀원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자료에 나온 회계 수치가 터무니없이 틀려 사장을 비롯한 임원들 앞에서 큰 수모를 당했기 때문이다.

"누가 잘못 만든 거냐"며 노발대발하는 팀장 앞에 그는 냉큼 "제가 잘못했다"고 나섰다. 여친이 엑셀 작업에서 실수한 것을 눈치채고 감싸주러 나선 것.김씨는 "그 후 2주 이상 야근을 자청하며 '백의종군' 했지만 여친의 애정 공세가 은근히 진해져서 좋았다"고 털어놨다.

이상은/이정호/김동윤/이고운/강경민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