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 수행 비서인 김 과장은 오늘도 아침 6시 전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회사가 아닌 사장 집 앞에서다. 일찍 출근하는 사장보다 10분 먼저 대기하는 건 기본이다. 출근하는 차안에서는 오늘의 일정을 미리 보고해야 한다. 외부 손님을 만나는 일정이라도 있을라치면 약력을 미리 꿰고 있어야 한다.

저녁 일정도 비슷하다. 거의 매일 저녁 약속이 있는 사장을 모셔야 한다. 약속이 끝난 뒤 사장 집까지 수행한 뒤 귀가하는 시간은 자정 무렵.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귀가하자마자 드러눕기 바쁘다.

물론 김 과장이 마냥 힘든 것만은 아니다. 수행비서라는 직함만으로도 과장 이상의 대우를 받는다. 각종 사내 정보도 남보다 빨리 알 수 있다. 비서를 지낸 선배를 보면 앞으로 잘 풀릴 것이란 희망도 있다. 혼자 있을 때 가끔은 어깨에 힘을 주어 보지만,그래도 하는 일은 '따까리'요,'가방 모찌'다.

◆수행 비서 덕목은 '무거운 입,열린 귀'

대기업 사장의 수행비서로 일하는 홍모 차장(42).그의 일과는 유명 호텔 피트니스 클럽에서 시작된다. 그 곳에서 운동을 하는 사장의 일정에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새벽 운동이 끝나는 7시까지는 운전기사와 함께 피트니스 클럽 휴게실에서 대기한다. 대기시간이 편한 것도 아니다. 새벽부터 여기저기서 전화가 빗발친다. "사장님 일정에 변동사항 없느냐"는 확인부터 "오늘 어른의 심기는 어떠냐"는 안부까지 묻는 임원들과 상대하고 나면 아침밥을 먹을 시간도 없다.

그렇다고 일과시간에 쉬는 것도 아니다. 사장 스케줄을 확인하려는 주요 부서장들과 외부 인사들의 전화로 휴대폰이 쉴 틈이 없다. 점심시간 때쯤이면 휴대폰 배터리는 벌써 방전된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선별해 받는 게 비서가 겸비해야 할 능력 중 하나다.

휴대폰 노이로제보다 더한 스트레스는 5분 대기조의 인생이다. 예정에 없이 공장을 방문한다고 나서면 정신없이 바쁘다. 저녁약속 때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찾는 일이 있어 가까운 곳에서 대기해야 한다.

홍 차장이 수행비서로 '발탁'된 것은 대리 때인 7년 전.회사 관행상 다른 보직으로 이동할 때가 됐지만 사장은 조금만 더 일해 달라고 말한다. 홍 차장은 "수행비서를 하다보면 듣지 않아야할 이야기도 듣게 된다"며 "이를 못 들은 척하고 틈나는 대로 사내 여론을 가감없이 전달하는 걸 사장이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홍 차장이 말하는 비서의 제1덕목은 '무거운 입,열린 귀'인 셈이다.

◆수행비서의 일과는 새벽1시에 시작?

국내 굴지의 공기업에서 한때 회장 수행비서로 일하다 지금은 다른 직장을 찾은 박모씨.그는 "수행비서의 사생활은 자정 이후에 시작한다"고 말한다. '어른'을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드린 뒤 비슷한 기업의 수행비서끼리 연락을 취해 술자리를 한다는 것.박씨는 "이런 저런 사정이 있어 수행비서 4명이 모이려면 새벽 1시가 돼야 한다"며 "이때부터 1시간 동안 재빨리 술마시고 귀가하는 것이 수행비서들"이라고 말했다. 어른의 일정이 다음 날 새벽에 시작하기 때문이다. 박씨는 "수행비서는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만큼 같은 스트레스를 갖고 있는 수행비서끼리 만나 풀곤 했다"고 회상했다.

대기업 회장의 비서인 이모 부장.그는 비서생활만 거의 10년이 넘었다. 치밀한 일처리,묵직한 입,나서지 않는 행동거지 등 비서의 덕목을 두루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이 부장을 회장도 아주 신뢰한다. 임원에 대한 사내 평판을 묻는 것은 물론 가정의 대소사까지 이 부장과 상의할 정도다.

남들이 보면 이 부장은 스트레스도 없는 것 같다. 언제나 같은 표정에 말수도 적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부장도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이 부장은 "항상 그림자처럼 살아야 하는 비서의 애환을 남들은 잘 알지 못한다"며 "시간이 나는 대로 격한 운동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곤 한다"고 말했다.

◆열 남자비서 안 부러운 여비서

최고경영자(CEO)에게 똑똑한 여비서는 수행비서 못지않게 중요하다. 네트워킹과 경조사 등을 꼼꼼히 챙겨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능력이 빼어난 여비서들은 CEO와 오랫동안 생활하는 경우가 많다. 전모씨는 금융회사 CEO를 지낸 사람의 명비서로 유명했다. 사람 이름만 대면 언제 어디서 만나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까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다보니 CEO가 자리를 옮길 때마다 함께 움직였다.

굴지의 대기업에서 오랫동안 비서를 지내다 퇴직한 이모씨도 현역 때 명성이 자자했다. 10여년 넘게 총수를 소리없이 모셔왔다. 총수가 사무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이씨를 찾을 정도로 신뢰도 대단했다. 그룹 내에서 그의 발언권도 높아졌지만 그는 자신을 낮춘 채 총수를 보좌하는 역할에 충실했다.

현역 최장수 최고령 비서인 전성희 대성 이사(68).그는 30년째 김영대 대성 회장을 보좌하고 있다. 전 이사는 "경영자를 제대로 보좌하기 위해선 비서는 단순히 서류와 차나 나르는 원시적인 행동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며 "임원을 비롯해 조직원 전체의 업무를 리드하고 조정하려면 적어도 사내 임원급 정도의 마인드를 스스로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도 출세의 보증수표

공무원 사이에는 '공 · 비 · 총'이란 말이 유명하다. 공보관 비서실장 총무과장을 일컫는 말이다. 장관을 수시로 만날 수 있고 각종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 자리를 거치는 사람은 대부분 승진이 보장된다. 바로 윗자리로 승진하거나,해외 주재관으로 나가는 게 관행이다. 능력도 능력이지만,고생한 것에 대한 대가라는 점에서 이런 관행에 문제를 삼는 공무원들은 드물다.

일반 기업도 마찬가지다. 비서실 출신은 우대한다. 일부 기업에선 비서 업무를 마치면 원하는 자리를 골라가라고까지 한다. 비서실장이라도 지내면 계열사 CEO로 가곤 한다. 삼성이나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 계열사 사장에 비서출신이 많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비서의 생존법

한 금융회사 비서실에서 일하는 정모 과장.그는 시시때때로 영업점장들의 전화를 받는다. CEO와 면담일정을 잡아 달라는 부탁이 많다. 그러다 보니 영업점장들의 정 과장에 대한 태도는 아주 싹싹하다. "정 과장,왜 이러시나. 내 사정 잘 아시면서…"식으로 반쯤 경어를 쓰는 사람도 상당하다.

임원이나 본부 부서장도 비슷하다. 대놓고 하대를 하지 못한다. 물론 "너 그렇게 뻣뻣하게 굴다가 어찌되는지 한번 보자"고 벼르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정 과장은 "비서에게 막 대하는 간부를 물 먹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고 말했다. 맘에 들지 않는 간부에게는 CEO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결재시간을 잡아주는 게 대표적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칭찬보다는 꾸지람을 듣는 경우가 많다는 것.반대로 평소 비서들에게 잘하는 간부에게는 CEO의 기분이 아주 좋을 때 결재를 받으시라고 귀띔한다고 한다. 비서들 나름대로 생존하는 방법이다.

정인설/이정호/김동윤/이상은/이고운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