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부터인가 우리의 관심은 '양극화 문제'에만 쏠려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서울과 지방,강남과 비(非)강남,부자와 서민 등 온갖 대립적인 구도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다보니 사회의 양극화 현상이 '우리가 선택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교육 양극화는 1970년대 직장인들이 신도시인 서울 강남에 몰려 들었고,공부 잘 하는 학생들이 강남으로 이사를 갔고,시장성을 확인한 사설 학원들이 새로운 사업지로 강남을 선택한 결과물이다. 영화 아바타에 10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린 반면 순수 예술영화는 상영관조차 잡기 어려운 양극화 역시 선택의 결과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극장을 찾은 관람객의 30~40%를 순수 예술영화 상영관에 강제 배정할 수는 없다.

1등 제품이 시장을 싹쓸이하는 '승자독식'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제품이 나오자마자 사용 후기를 즉각 인터넷에 올리고 공유하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어난 탓이다. 흠이 있는 2,3류 제품들이 시장에서 사라지고 승자가 독식하게 만든 주체는 예전보다 더 똑똑해진 네티즌들이다.

경제 발전의 논리도 다를 게 없다.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넘어선 1970년대 후반에 저임금 근로자들의 파업과 도시빈민 철거문제가 터져 나왔다. YH무역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사건이 대표적이다. 도시 철거민의 비애를 그린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1978년)이 나온 것도 이 무렵이다.

3저(低)호황의 물결을 타 1인당 국민소득 5000달러 능선을 힘차게 넘어선 1989년엔 노동자 대파업이 사회를 뒤덮었다. 경제발전을 주도하는 선두그룹의 질주는 사회의 간극을 벌려 놓았고,그 간극을 좁히려는 에너지가 역류했다. 선두그룹이 과감히 질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경제성장의 비법'이었고 동시에 '저소득층의 삶을 개선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국민소득 1만달러를 넘어서면서부터 우리는 망각의 늪에 빠졌다. 기업 경쟁력은 생각하지 않고 국민소득이 1만달러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원화가치를 인위적으로 높게 유지했다가 외환위기에 빠졌다. 그 이후에는 복지재정을 늘리고 양극화를 해소하는 데에만 매달렸다. 성장의 아이콘인 '삼성'과 '강남'은 공적(公敵)으로까지 내몰렸다.

오는 6월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서는 무상급식과 서민생계 지원 등 선심성 공약이 판을 치고 있다. 1995년 1만달러 국민소득을 넘어선 뒤 14년이 지났는데도 2만달러 시대에 진입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한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의 얼굴은 왜 바뀌지 않고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은 찾아보기 어렵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추구한 정치철학자 존 롤스는 "빈곤층의 삶이 개선된다면 불평등이 확대돼도 괜찮다"는 차등원칙을 제시했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은 '선부론(先富論)'으로 불균등 발전을 정당화해 질주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양극화 포비아(공포증)'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선두 그룹에 채워진 족쇄를 풀어줘 더 앞서나가도록 독려해야 하는데,대중의 비판이 두려워 여전히 발목을 잡고 있다. 사회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양극화는 '불행을 가장한 축복(disguised blessing)'이라는 사실을 되새겨야 한다.

현승윤 경제부장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