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하루종일 비상대책회의를 하고 귀가해 잠자리에 들어서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입니다. "

오규현 한솔제지 대표는 22일 "지난달 27일 칠레 지진이 일어난 이후 하루 4시간 이상 잠을 자본 적이 없다"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하루가 다르게 펄프값이 급등하던 상황에서 주요 수입원인 칠레의 펄프 공장들이 지진으로 큰 타격을 입어 펄프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제지업계가 펄프 공급에 비상이 걸렸다. 국제 펄프 가격이 고공행진을 벌이고 있는 데다 수급이 사상 최악으로 꼬여가고 있는 탓이다. 칠레 지진이 펄프 가격 상승세에 기름을 부었다.

제지업계에 따르면 펄프 국제가격은 이달 들어 t당 770달러 수준을 넘어섰다. 지난해 3월의 t당 470달러에 비해 164% 오른 셈이다. 업계에서는 다음 달이면 t당 800달러 선에 육박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 인쇄용지업체들은 생산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관측된다. 권오근 한국제지공업연합회 이사는 "글로벌 경기침체로 2008년 3분기부터 하락하던 펄프 가격이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으로 지난해 2분기부터 강세로 돌아선 데다 칠레 지진이 발생하면서 가격 상승 속도가 빨라진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국제 펄프 가격은 지난해 6월 인도네시아를 비롯해 북유럽 일부 국가 등 주요 펄프 생산국들이 공장 가동을 멈추면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주요 생산국들은 펄프 가격이 원료인 목재칩 값에 비해 싸다는 이유를 들며 생산량을 줄여왔다. 생산 감소에 따라 지난해 3월 t당 470달러 수준이던 국제 펄프 가격은 12월 672달러에서 올 1월엔 723달러로 급등했다. 이런 상황에서 칠레 지진이 발생했다.

문제는 칠레산 펄프가 우리나라 연간 펄프 수입량(약 200만t)의 29%(59만t)로 의존도가 높다는 점이다. 국내에서 쓰이는 칠레산 펄프의 대부분을 만드는 회사는 펄프 및 종이 제조 회사인 '아라우코(Arauco)'와 'CMPC'.아라우코는 공장 5곳 중 2곳,CMPC는 공장 3곳 중 1곳이 지진 때문에 일부 시설이 무너진 데다 용수 및 전기 공급 부족으로 공장 가동을 전면 중단한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칠레 지진 복구가 빠르게 이뤄지지 않으면 국제 펄프 가격 급등세가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는 올해 최소 40만t이상의 수입 공백이 발생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에 따라 다음 달 이후 종이값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업계는 5% 정도 추가 인상을 검토하고 있다.

수급사정은 더 꼬여가는 양상이다. 국내 업계가 확보하고 있는 펄프 재고는 한 달분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펄프를 생산하는 무림P&P가 공급하는 펄프 양은 국내 소비량의 20% 정도로 국내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업계에서는 핀란드나 캐나다 등으로 수입처를 다변화하는 방법으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한솔제지 관계자는 "북유럽,북아메리카산 펄프는 칠레산보다 값이 다소 비싸고 품질도 칠레산에 못 미친다"며 "게다가 핀란드에선 설상가상으로 20년 만의 항만 파업으로 인해 극심한 수출 차질까지 빚고 있어 대책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임기훈 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