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과장은 오늘도 술자리를 찾는다. 접대를 위해서다. 감기 걸린 아내와 징징대는 아이들이 눈에 밟힌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는다. 생사여탈권을 쥔 거래처 사장과 인사권을 쥔 직속 상사의 부릅뜬 눈을 생각하면,바삐 돌아가는 술잔 속에서도 정신줄은 놓을 수 없다. 혹 필름이 끊겨 내 집 못 찾는 게 대순가. 절대권력 '갑(甲)'의 편안한 귀가를 위해서라면,콜택시 호출 번호를 잊지 않는 게 최우선 과제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을(乙)'은 평생 '갑'의 무릎 밑에서 '파테르' 자세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유는 단 하나,가정과 회사의 평화를 위해.사람의 마음을 사야 살 수 있는 '포섭'의 시대,김 과장 이 대리들의 현실이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고 잠시 위로하지만 오늘도 '갑'의 입맛을 찾기 위해 정보의 안테나를 곧추 세우는 게 김 과장 이 대리들이다. 그러면서 조금씩 접대의 기술을 익히고 있다.

◆상대방 눈높이에 맞춰라

송승영 하나은행 강서영업본부장은 자타 공인 '접대의 달인'이다. 성공 비결은 눈높이 접대다. 우선 시장 상인을 만날 때는 편한 점퍼 차림으로 간다. 먼 거리라면 승용차 대신 스쿠터를 탄다. 반면 VIP 고객과 함께할 경우에는 최고급 양복을 차려 입는다. 고객이 계약서에 서명할 때는 싸구려 볼펜 대신 명품 만년필을 정중히 내민다.

업무 현장에서는 그의 눈높이 접대가 한층 빛을 발한다. 상대방이 가장 힘들어 하거나 귀찮아 하는 업무를 도와주는 전략이다. 법인영업이 대표적이다. 해당 기업의 실무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보고서가 타깃이다. 그는 "격무에 시달리는 거래처 실무자들을 위해 상부 보고용 자산운용 리포트를 대신 써 주고 표지만 만들어 붙이게 한다"고 귀띔했다. 업무를 덜어주고 나면 자연히 상대방과 친해져 신뢰가 쌓이고 이는 고스란히 거래실적으로 이어진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박모 과장(38)은 경매 컨설팅으로 거래업체 구매 담당자들을 사로 잡았다. 그는 입사 초기부터 부동산 경매에 관심을 갖고 공부해온 덕에 이 분야에선 전문가로 통한다.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도 경매를 통해 장만했다. 박 과장은 거래업체 사람들에게 부동산 경매에 관한 모든 서비스를 대행해 주며 점수를 따고 있다.

◆감동으로 철갑을 뚫어라

접대를 하는 이들의 공통적인 바람은 상대방이 각인할 수 있는 추억을 남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차별화된 '플러스 알파'를 찾아야 한다.

보험사에 다니는 최모 과장(41)은 접대에서 사후관리를 최고로 여긴다. 그는 접대를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장 신경쓰는 술자리 현장보다 귀가에 초점을 맞춘다. 고객을 모범택시나 대리운전 차량에 태워보내는 것은 '하수'다. 그는 가급적 차에 같이 타고 간다. 동승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다. 그리고 대미는 고객의 집 문 앞에서 장식한다. 미리 준비한 과일세트를 상대방의 부인에게 전한다. "남편의 어깨가 절로 펴지게 만드는 전략"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제약회사에 다니는 김모 과장(34)도 접대의 사각지대 중 하나인 이동 시간에 주력하고 있다. 김 과장은 담당 지역 의사들이 해외로 나갈 때는 항상 자신의 차로 공항까지 배웅을 한다. 입국할 때도 공항에 마중을 나간다. 그는 "더러 불편해 하는 의사들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반응이 좋다"며 "공항으로 오고 가는 몇 시간 동안 밀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게 장점"이라고 말했다.

접대의 달인들은 선물 하나에도 '스토리'를 담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은행원인 한 모 과장은 "백화점에서 주문해 보내는 50만원짜리 한우세트보다 도축장에 직접 가 고른 고기를 투박하더라도 현장에서 포장해 전달하면 훨씬 고맙게 받아들인다"고 설명했다. 발품은 곧 배려와 정성으로 읽히게 마련이라는 얘기다.

◆진심은 통한다

딱 한 번의 접대로 승부를 봐야 할 때가 많다.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럴 때일수록 자신을 버리는 '자포자기'형 접대가 위력을 발휘한다. 국내 유명 IT업체 영업팀장 김정식 과장(37 · 가명)이 대표적인 케이스.김 과장의 소속사와 고객사의 회식 날,술잔은 돌고 돌았지만 분위기가 좀체 무르익지 않았다. 민숭민숭한 분위기는 3차 노래방까지 이어졌다.

김 과장은 자기만의 '쇼'로 돌파구를 찾았다. 대부분이 만취모드로 빠져드는 순간, 그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를 외치고는 후다닥 밖으로 뛰어 나갔다. 김 과장은 정확히 20분 후 노래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는 갑자기 옷을 하나둘씩 벗기 시작했다. 노래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모두의 눈은 김 과장의 맨몸 위에 붙은 검은색 테이프로 쏠렸다. "제 이름은 김정식입니다"이라는 문구였다. 그리고 돌아선 그의 등에는 이런 말이 붙어져 있었다. "보여드릴 건 몸뚱이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그 문장을 본 걸 확인한 김 과장은 'YMCA'라는 노래에 맞춰 과격한 율동을 하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고객사 일행은 모두 기립박수를 보냈고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김 과장은 "접대 자리에서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선 연애시절 통했던 일종의 '무대뽀'정신이 필요한 것 같다"며 "상대방에게 '당신을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려면 어느 정도의 자기희생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나만의 노하우를 개발하라

술 못 마시는 사람에게 접대는 고역 중 고역이다. 특히 상대방이 주당이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외국계 홍보대행사에 다니는 최모 대리(29)는 '최약체 공략'으로 이런 위기를 돌파하곤 한다.

"1차 자리에서 술이 가장 약한 사람이 누군지를 파악합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계속 잔을 주는 거죠.그러면 내 술잔이 상대방 자리 앞에 계속 가 쌓여있기 때문에 술을 받아 마셔야 하는 횟수가 확실히 줄어들게 됩니다. "

이후 그 상대방이 만취상태가 되면 부축해서 택시를 태워 집까지 '직접 모셔다'드리는 게 그의 노하우다. 그러면 '잘 챙기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은 물론 '술 못 마신다'는 얘기도 의외로 적게 듣는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지속성'이다. 승진에서 물을 먹었다고 곧 바로 끈을 놓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오히려 더 심혈을 기울여야 결정적 순간에 화룡점정의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꺼진 불도 다시 봐야 한다는 얘기다.

이와 함께 상대가 접대를 받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접대 현장에서 업무 관련 화제를 하는 것도 삼가는 게 좋다. 일 얘기는 나중으로 제쳐두고 편안한 화젯거리로 분위기를 띄우는 게 우선이다. 흥겨운 분위기가 서너 번 되풀이되다보면 상대 쪽에서 먼저 문을 열게 마련."뭐 필요한 것 없냐"고 물어올 때가지 기다리는 게 최고의 정석이다. '1타 3피'가 아닌 '3타 1광'전략인 셈이다.

가족을 공략하는 것도 오래된 비법이다. 가령 자녀가 고3이라면 입시에 관한 선물을 주는 게 좋다. 집안에 편찮은 어르신이 있다면 사골이나 홍삼 등 건강식품을 챙겨주는 게 좋다.

정인설/이관우/김동윤/이상은/이고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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