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정기주주총회에서 상장사들의 '경영권 방어장치' 도입이 핵심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주총시즌 초반임에도 이미 인천도시가스 플렉스컴 등이 방어장치 도입 안건을 통과시켰고 유사한 움직임도 잇따르고 있다.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산업구조 재편 조짐이 보이자 경영권 강화 욕구가 뚜렷해 졌다는 분석이다. 또 정부가 투자 · 고용 확대를 위해 경영권 안정을 지원하고 있어 이 같은 추세는 주총시즌 내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14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상장사들이 정기주총에서 도입하고 있는 경영권 방어장치 중 대표적인 것이 황금낙하산이다. 플렉스컴은 지난주 정기주총에서 '황금낙하산' 제도를 전격 도입했다. 적대적 인수합병(M&A)으로 이사진이 강제 퇴임할 경우 대표이사에게 50억원,이사에게는 30억원의 보수를 지급하라는 내용이다.

삼성전자에 LCD TV와 휴대폰용 연성인쇄회로기판(FPCB)을 납품하는 플렉스컴은 지난해 사상 최대 영업이익(121억여원)을 거두는 등 성장성을 재평가받고 있는 상황이다. 회사 관계자는 "외부 공격을 막아내고 동업자인 최고경영진 간 지분 경쟁이 있다는 시장 일각의 우려를 잠재우기 위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바이오 · 제약업계의 기린아로 급부상한 셀트리온도 오는 19일 주총에서 황금낙하산 제도를 도입한다. 퇴직금 이외의 보상금을 최고경영자의 경우 무려 200억원으로 책정했다. 이사들은 50억원씩이다. 이 회사는 작년에 바이오시밀러(단백질 복제의약품) 분야가 신성장 육성산업으로 지정된 데다 삼성전자가 관련 분야 진출을 선언하면서 '삼성전자에 인수될 것'이란 소문에 시달려 왔다. 또 외국 기업들의 관심도 급증하자 서정진 회장이 경영권 강화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의약품 개발업체 씨티씨바이오도 대표 50억원,이사 30억원의 퇴직보상금을 명시한 황금낙하산 조항을 26일 주총에서 의결할 방침이다. 지난해 발행한 200억원의 대규모 신주인수권부사채(BW)가 주식으로 전환될 경우 대주주 지분율이 낮아지는 점을 보완하기 위한 조치다.

이사 선임이나 해임을 어렵게 해 공격진의 이사회 진입을 막는 장치인 '초다수결의제' 채택도 늘고 있다. 오픈베이스는 26일 주총에서 적대적 M&A 시도가 있을 경우 이사 · 감사의 선임 또는 해임결의에는 참석주주의 90%,의결권 주식의 70%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는 안건을 상정한다.

앞서 지난달에는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더존비즈온의 관계사로 더존그룹 지주회사 격인 더존다스가 임시주총에서 초다수결의제를 통과시켰다. 디스플레이업체 코텍은 초다수결의제와 황금낙하산 제도를 모두 신설하는 내용의 정관 변경을 추진 중이다.

대주주의 의결권 강화를 목적으로 한 '집중투표제 배제' 조항을 신설하는 곳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인천도시가스가 지난 12일 주총에서 '집중투표제 배제'안을 통과시켰고,웹젠버추얼텍은 26일 주총에 안건으로 올린다. 집중투표제는 2명 이상의 이사를 뽑을 때 한꺼번에 투표를 실시해 득표 순서대로 이사를 선출하는 제도다.

집중투표제 아래선 소액주주들이 힘을 합치면 자신들이 미는 사람을 임원으로 선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는 효과가 생긴다. 집중투표제는 이를 배제하는 조항이 정관에 없을 경우 3% 이상 주주의 요청시 받아들여야 한다.

금융위기 국면이 이어지자 경영권 방어에 대한 대주주들의 관심이 높아졌고,이달 초 '포이즌필' 제도 시행을 담은 상법 개정안이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점도 관련 논쟁이 다시 부상하는 계기가 됐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하고 있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정부 의도는 자사주 매입이나 유보금을 쌓으며 경영권 방어에 힘을 빼지 말고 기업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투자에 나서도록 하겠다는 것"이라면서도 "M&A가 활성화돼야 경쟁력이 떨어지는 기업과 경영진이 퇴출되고 주주가치도 극대화되는 측면이 있는 만큼 도입을 반대하는 주주들과 회사 간 갈등이 커질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한편 한국코스닥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4월 기준 175개사가 초다수결의제를,124개사가 황금낙하산제를 운영하고 있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