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에는 다른 어느 나라에도 없는 특별한 단어가 있다. 바로 정(情)이란 단어다. 어느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느낌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군 복무 시절 서로 힘든 와중에도 몰래 챙겨놓은 '빵'을 건넸던 동기가 생각난다. 화장실에서 눈물,콧물 흘리며 서로 힘내자면서 어깨를 다독여주던 그와 나는 특별한 정을 나눴다. 전역 후에도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물으면서 그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집사람과의 연애 시절도 그랬다. 휴대폰은 커녕 컴퓨터도 없던 시절 데이트를 약속해도 무슨 일 때문에 늦어지면 연락할 방법이 없어 발을 동동 굴렀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공중전화박스를 찾아 집으로 전화해 "혹시 전화가 오면 무슨 일 때문에 늦어진다고 얘기 좀 해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때는 기다리게 하는 것조차 너무 미안했고,애틋했던 것 같다.

학창 시절,버스를 기다리는 것도 그랬다. 혹여 학교에 늦을까 걱정이 돼 버스가 오는 시간을 대충 짐작하고 그 전에 가서 기다렸지만 제멋대로인 버스 때문에 30분이고 1시간이고 기다린 적이 많다.

이런 과거를 회상해 보면 지금은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 편지 대신 이메일을 쓰고,휴대폰을 가지고 다녀 언제 어느 때나 원하는 사람에게 연락이 가능하다. 또 버스정류장에서는 내가 기다리는 버스가 몇 번째 전 정류장을 통과했는지 화면을 통해 안내해준다.

이렇게 디지털화한 세상은 우리에게 편의,신속,정확성 등을 제공하면서 우리 삶의 질을 더욱 상승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세상에서 조금씩 정이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편지를 쓰면서 그리워하던 내 모습,그녀가 기다릴까 초조해 하며 애태우던 마음,버스가 안 와 가슴 졸이던 기억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디지털 세상이 우리의 정을 조금씩 덮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길을 걸으면 어딘가에서 CCTV가 나를 촬영하고 있고,어딜 가도 휴대폰 GPS가 내 위치를 파악하고,신상정보가 인터넷에서 파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참 오싹한 기분이 든다.

국내에선 유일하게 심장병 전문병원으로 30년을 이어온 세종병원은 의료서비스를 높이기 위해 병원 내 모든 의료차트를 전산화하고,안내사항을 중앙 통제할 수 있는 통합의료정보시스템 구축을 대대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종이 차트는 머잖아 의료박물관,병원역사관 같은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구시대의 유물이 될 것이다.

참,아이러니한 것은 아날로그를 그리워하면서도 통합의료정보시스템을 구축하자고 제안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하지만 난 그 시절의 정이 그립고,아날로그가 그립다.

박영관 세종병원 회장 sjhosp@sejong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