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이 드러난 것 아닌가….' 직장생활 10년차인 김 과장은 어느날 출근길에 가슴이 철렁했다. 따지고 보면 앞만 보고 달려온 시간이었다. 죽어라 일하고,온갖 아이디어는 다 짜냈다. 더 이상 내놓을 게 없다. 밑천이 드러났는데도 회사에서는 더 내놓으라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다. 신기술을 아는 데만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회사는 재충전할 시간을 줄 기미가 없다. 그렇다면 스스로 알아서 하는 수밖에.대학원이나 각종 자격증을 알아보지만 만만치 않다. "여러분의 자기계발만이 본사의 미래"라고 강조하던 윗사람들에게 "야간 대학원이라도 가겠다"고 말하면 안색이 싹 변한다. "일은 일대로 하고 알아서 하라"는 투다. 이런 악조건에서도 직장생활과 학업을 병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샐러던트(saladent · salaryman과 student의 합성어)'들이다.

◆이래서 영어공부를 시작했지만…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 대리(34)는 작년 말 미국 출장을 다녀온 뒤 충격을 받았다. 토익 900점대 실력이니 영어라면 자신 있었다. 하지만 입국심사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질문을 잘못 알아 들었던 것.결국 뒤에 서 있던 후배의 도움을 받아 겨우 공항을 빠져 나와야 했다. 굴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4박5일간 이뤄진 협력업체 미팅에서 그는 그야말로 '꿔다놓은 보릿자루'였다. 어디서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을지 몰라 침이 마르고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흘렀다.

귀국길에 그는 굳게 결심했다. 영어공부를 하자고.지금은 스마트폰에 '미드(미국 드라마)'를 자막없이 다운로드받은 뒤 출퇴근 시간을 이용해 영어공부에 힘을 쏟고 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갈지 그도 자신할 수 없다.

중견 건설회사에 다니는 이모 과장(35)도 영어공부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역시 외국출장에서 거래업체 사람들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아무리 둘러봐도 학원에 다닐 시간이 없다. 그래서 택한 것이 디지털 기기다. 다양한 어학 학습기능과 사전을 지원하는 PMP(휴대용 멀티미디어 플레이어)를 통해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 그는 "공부를 위해 굳이 회사 눈치를 봐가며 학원에 갈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샐러던트라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

국내 대기업에 근무하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한 대학에서 MBA(경영학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유모씨(35).그는 MBA 준비 학원을 선정할 때부터 보안에 만전을 기했다. 행여 회사 동료들이 이 사실을 알면 준비과정이 순탄치 않을 것으로 생각해서였다. 그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학원에서 직장동료를 만났지만 둘만의 약속으로 끝까지 보안을 유지했다. 아무리 퇴근 시간이 늦어도 집 근처 독서실로 직행해 새벽 2시까지 공부하는 강행군을 계속하길 1년,유씨는 결국 입학허가서를 받는 데 성공했다.

국내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는 금융회사의 남모씨(31)는 너무 순진해서 손해를 봤다. 그의 가방 속에 있던 관련 서적을 본 한 동료는 회식 자리에서 큰 소리로 "로스쿨 준비해? 책 가지고 다니더라"고 말했다. 이때 어물어물했던 남씨는 이후 신경전에 시달렸다. "이제는 변호사가 ?C값이라더라"라는 말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조금만 일찍 퇴근하려 해도 "공부하게?"란 반문이 돌아왔다.

업무 성과가 약간만 부진해도 "공부하니까"란 비아냥이 쏟아졌다. "뭐 한답시고 나대는 사람치고 잘되는 꼴을 못 봤다","로스쿨 출신은 사시 출신들에게 밀려서 로펌에서도 안 데려간다더라"는 뒷말도 남씨를 괴롭게 했다.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로스쿨 준비에 매진하고 있는 남씨는 "사람들의 질투가 이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며 "이럴 줄 알았으면 준비하는 사실을 철저하게 숨길 것을…"이라며 후회했다.

◆두드려라,열릴 것이니

국내 한 공기업에 다니는 차모 과장(37)은 최근 사내 해외 MBA과정 대상자로 선발됐다는 통보를 받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해외 연수 대상자로 선발되기까지 대학 입시 못지않은 몸고생과 마음고생을 견뎌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다니는 회사는 입사 5~7년차 때 해외연수에 지원하는 것이 관례다. 정확히 입사 5년차가 되는 해부터 응시했지만 부족한 영어 실력인지 낙방을 거듭했다.

입사 8년차가 넘어가는 시점부터는 회사 후배들이 "그 정도 했으면 후배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하지 않냐"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온갖 굴욕을 딛고 드디어 성공한 차 과장은 "자기가 부지런히 찾고 준비해야지,막연히 기다리기만 하면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조언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다니던 임모씨(29)는 작년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임원까지 승진할 것이란 자신이 없었다. 무능력한 상사와 무기력한 선배들처럼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강했다.

임씨는 로스쿨,의학전문대학원,치의학전문대학원 등에 대해 꼼꼼히 탐색하는 기간을 가졌다. 그동안 회사일은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하고 욕먹지 않을 만큼만 하면서 부지런히 관련 정보를 수집했다. 한푼이라도 학비에 보태기 위해 학원 개강 마지막날까지 회사에 다니는 지독함도 보였다. 그는 "반드시 전문직으로 옮겨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독하게 뛰어든 게 성공비결인 것 같다"고 말했다.

◆'열심히 공부한 당신'의 미래는?

한때 '열심히 일한 당신,떠나라'는 광고 카피가 유행했다. 그렇다면 '열심히 공부한 당신'에게 주어지는 것은 무엇일까.

어학 공부에 열심이었던 제약회사의 윤모 대리(32)는 이에 대해 "막막하더라"고 털어놨다. 학창시절부터 언어 공부에 소질과 흥미가 있었던 윤 대리는 회사에 입사해서도 영어와 일본어 공부를 계속했다. 해외 체류 경험이 없었는데도 상당한 어학 점수를 취득한 그는 지난 인사고과 때 기분좋게 어학성적표를 제출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업무 기획 등 윗사람들의 눈에 들 만한 '노른자위 업무'에서 싹 밀려났다. 대신 번역이나 통역 등 잡일을 떠맡게 됐다. "영어(일본어) 참 잘하네"란 칭찬은 공치사일 뿐,아무리 처리해야 할 업무가 많다고 하소연해도 어학능력이 필요한 자리에 강제동원당하는 처지가 됐다.

해외 유명대학 MBA 과정 진학을 꿈꾸며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는 3년차 은행원 최모씨(31)도 앞길이 막막하긴 마찬가지다. 직장인 상당수는 여전히 MBA를 신분상승의 기회로 여기고 있다. 최씨 또한 한시라도 빨리 MBA 유학길에 오르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입행 다음 해부터 MBA 준비를 시작해 절차를 마쳤다.

하지만 막상 그의 마음은 뒤숭숭하기 짝이 없다. 가장 큰 걱정은 유학 후 돌아와서 어떤 진로를 걷느냐다. 억대의 돈을 써서 MBA를 다녀와도 현재 직장에서는 연봉이 크게 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최씨는 "MBA를 마친 뒤 무엇을 할 것이냐를 결정하지 못해 휴직을 할지,회사를 그만둘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고운/이정호/김동윤/정인설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