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29일 냉장고 21만대를 대량 리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달 초 한 가정집에서 발생한 양문형 냉장고 파열사고에 따른 후속조치다. 2005년 3월부터 2006년 6월까지 생산해 국내에서 판매한 양문형 냉장고 SRT · SRS · SRN 계열 일부 모델에 대해 이날부터 내년 1월31일까지 3개월 동안 리콜하기로 했다.

삼성전자 창립 40주년 행사를 하루 앞둔 시점에 나온 리콜 발표라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이번 창립기념 행사는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가 글로벌 경쟁사보다 월등한 실적을 기록하고 있는 상황에서 치러지는 '경사(慶事)'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유는 무엇일까. 리콜 배경에는 '품질경영'의 상징인 이건희 전 회장(사진)의 대로(大怒)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회장은 지펠 냉장고 폭발 사고를 언론보도를 통해 알고 크게 화를 냈다는 게 삼성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품질경영을 20여년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벌어진 데 대한 분노였다는 것이다.

이 전 회장은 1987년 삼성 회장으로 취임할 때부터 "불량은 암"이라며 품질경영을 강조해 왔다. 삼성 도약의 기반이 됐던 1993년 신경영선언(프랑크푸르트 선언)도 불량문제가 도화선이 됐다. 당시 세탁기 제조과정에서 금형 불량으로 접촉면이 맞지 않자 삼성전자 직원들이 플라스틱을 칼로 긁어내 이를 맞추는 장면이 사내방송에 잡힌 것이다. 이 전 회장은 이를 전 사원들이 보도록 방송하라고 지시했다. "삼성전자의 수준이 어떤지 스스로 알아야 한다"는 취지였다. 1994년에는 무선전화기 출시 후 통화품질에 문제가 발생하자 전화기 15만대를 수거해 구미 공장에서 '화형식'을 갖기도 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창립 40주년 기념행사를 하루 앞둔 시점에 21만대의 냉장고 리콜을 전격 발표한 데는 이 전 회장의 뜻이 반영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 전 회장이 삼성전자의 약진에 자만하지 말라는 경고성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이 전 회장은 2004년 삼성이 사상 최대 이익을 올리자 2005년 신년사를 통해 "우리는 오르기는 어려우나 떨어지기는 쉬운 정상의 발치에 있다. 이 순간 위기의식으로 재무장하고 힘을 모으면 정상을 밟을 수 있지만,자칫 방심하면 순식간에 산 아래로 떨어지게 될 것"이라며 경고를 보냈었다.

이날 리콜도 삼성전자가 세계 1위의 전자업체가 되겠다는 비전 발표를 하루 앞둔 시점에서 이뤄진 것은 당시와 비슷한 이 전 회장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해석이다. 국내는 물론 해외언론까지 나서 삼성전자의 성장에 박수를 보내고 있는 지금이 '신발 끈을 다시 매어야 하는 시점'이라는 얘기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