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찍한 뒷마당이 딸린 집,주말마다 나가는 골프,싼 값에 채용한 가정부,아이들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는 영어….' 해외 주재원 하면 떠오르는 모습이다. 어느 정도는 맞다. 해외 주재원은 영어권 국가가 아니라도 대부분 아이들을 국제학교에 보낸다. 영어 걱정을 붙들어맬 수 있다. 개도국일 경우 가정부와 아이들 보모를 따로 둘 수도 있다.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골프를 주말마다 즐길 수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외면에 비친 모습이다. '속빈 강정'인 경우도 많다. 한국과의 시차로 인해 출근은 빠르고 퇴근은 늦다. 밀린 일 때문에 야근도 부지기수다. 밀려드는 손님을 모시느라 주말도 반납해야 한다. 행여 상사를 잘못 만나면 임기 내내 마음고생을 해야 한다. '안 보이면 잊혀진다'고 인사에서 밀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전국의 김 과장,이 대리가 꿈꾸는 해외 주재원 생활은 실제 어떨까.


◆아이들과 부인이 더 반기는 해외 근무

국내 종합상사의 조모 과장(40)은 LA지사에 4년 근무한 뒤 지난 7월 귀국했다. 그는 귀국을 앞두고 '세 가지를 끊으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여행과 골프,쇠고기가 그것이다. 한국에 오면 시간이 없다. 큰 맘 먹지 않으면 여행은 꿈도 꾸지 못한다. 미국에서 자주 했던 가족여행을 마음에 담아두면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다. 골프는 비용이 문제다. 미국은 아무래도 골프비용이 싸다. 한국에서 과장 월급으로 매주 골프치는 것은 애당초 힘들다. 한국 생활에 적응하려면 골프를 끊어야 한다는 얘기다. 쇠고기도 마찬가지다. 미국 쇠고기 값은 상대적으로 싸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맛도 한우에 못지않다. 자주 먹기도 한다. 이 맛을 기억하고 한국에서 쇠고기를 먹겠다고 나서면 살림에 지장을 받을 것이라는 충고였다.

조 과장이 귀국 전에 들었던 여행 골프 쇠고기는 미국 주재원의 장점을 그대로 드러낸다. 하는 일이야 한국과 별로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다. 그러다 보니 여행이나 골프 등 여가생활을 할 여유가 있다. 직장생활이 바쁘다는 이유로 포기했던 가정생활에도 충실할 수 있다.

조 과장이 가장 좋았던 것은 가족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초등학생인 아이 둘은 영어를 술술 한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학교가기도 좋아했다. 과도한 사교육과 숙제 부담에서 벗어난 아이들을 보는 것만으로 즐거웠다. 부인도 만족스러워 했다. 당장 시댁의 부담에서 벗어났다는 것에 환호성을 질렀다.

조 과장은 "해외 근무의 가장 큰 장점은 아이들 영어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아내의 바가지를 덜 듣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이나 중국 등 한국과 가까운 나라의 해외 주재원 부인 사이에서는 '시댁은 멀고 친정은 가깝다'는 말이 있다"며 "가까운 만큼 친정엔 언제든지 다녀올 수 있는 반면,시댁엔 외국에 산다는 이유로 전화 한 통화로 때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국제공항에 100번은 나가야 귀국한다

한 시중은행 뉴욕지점에서 근무했던 이모 차장(43).그는 3년 뉴욕생활 동안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100번쯤 나갔다. 손님을 마중하고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이 차장이 맡았던 업무는 지점 내 살림살이.그러다 보니 온갖 손님 뒤치다꺼리도 그의 몫이었다. 단순히 공항에 나간 것만이 아니다. 손님의 '격'에 따라 하는 일도 달라졌다. 저녁도 대접해야 하고,외국인과의 면담도 주선해야 했다. 남는 시간에는 관광안내도 하고 '운동'도 모셔야 했다.

이 차장은 뉴욕 인근의 관광코스를 반나절짜리,하루짜리,이틀짜리로 나눠 줄줄이 꿰고 있다. 이 차장은 "뉴욕에는 본사 출장자들이 항상 많기 때문에 저녁시간이나 주말 등 개인생활을 상당 부분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손님이 많은 KOTRA 직원들은 케네디 공항에 300번 나가야 3년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정도"라고 덧붙였다.

해외 주재원들의 가장 큰 부담은 본국 손님 모시기다. 주재원들 입장에서는 자주 오는 손님이지만,손님 입장에선 어쩌다 한번 가는 출장이다. 자칫 불성실하게 모셨다가는 "그 친구 안 되겠더라"는 말을 두고두고 들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손님이 많은 뉴욕 · 런던 · 파리 · 프랑크푸르트 같은 대도시 주재원들 사이에서는 기사와 관광가이드 통역 등 세 가지 일을 가외로 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이에 비해 브뤼셀이나 헬싱키 등은 최고의 근무지로 꼽힌다. 생활은 선진국 수준이다. 반면 한국 국적 항공사의 직항이 없어 찾는 손님이 드물다. 가족과 함께 삶의 질을 누리기에는 최상의 근무지다.
[金과장 & 李대리] 해외 주재원‥뉴욕근무 3년, 아들은 영어가 늘고 난 운전만 늘고…
◆환율 변화에 울고 웃어야 한다

대기업의 일본 오사카 주재원인 김모 과장(38)은 최근 고민거리가 늘었다. 작년부터 계속된 엔화 강세로 실제 연봉이 30% 가까이 줄었기 때문이다. 현지 화폐로 연봉을 지급하는 다른 기업과 달리 김 과장 회사는 한국돈을 기준으로 연봉을 주고 있다. 이달부터 일본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부인과 두 아이의 양육비를 생각하면 골치가 아플 지경이다. 김 과장은 "해외 주재원을 지원하며 금전적인 문제로 고민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현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야 할 판"이라며 씁쓸해했다.

중견 제약회사의 중국 상하이 주재원인 김모 차장(41) 역시 중국 위안화 급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김 차장은 주재비 및 월급을 미국 달러화로 받고 있다. 위안화 가치가 올라 환전하고 나면 손에 쥐는 게 전보다 훨씬 적다. 본사도 어렵다며 주재비를 올려줄 기미가 없다. 가능하면 돈을 아낄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인사와 귀국 후 자녀 교육도 걱정거리

해외 주재원들의 또 다른 고민은 인사상 불이익이다. 해외에서 근무하는 것 자체가 특혜라는 시각이 있다 보니 인사담당자들도 해외 근무자들을 뒷전으로 생각하곤 한다. 일본 도쿄에서 은행 지점장으로 근무했던 양모 이사(54)는 주재원 시절 임기도 되기 전에 귀국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지점장으로 있는 동안 입사 동기들이 임원으로 승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사고과에서 밀릴 게 없었던 그는 조바심이 났다. 본사의 임원들에게 이리저리 도움을 구했지만 "안 보이면 잊혀지는 것 몰라?"라는 말이 돌아왔다.

임원으로 승진하려면 인사권자인 은행장 눈에 자주 띄어야 하는데,외국에 나가 있으니 상대적 불이익을 받는 것은 감수하라는 얘기였다. 딱히 정해진 것은 없지만 지점장의 임기는 보통 3년이다. 초조해진 양 이사는 일본 근무 2년이 못 돼 본국 근무를 자처하고 귀국했다. 그 뒤 부장생활을 2년 더 한 뒤 올해 초에야 임원으로 겨우 승진했다.

자녀 교육도 해외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때 골치 아프게 하는 요인이다. 아이들 교육을 생각하면 현지에 남겨두고 싶다. 그렇지만 돈이 문제다. 아이들을 데리고 귀국하자니 영어실력이 퇴보할까 걱정이다. 상당수 해외 주재원들이 1~2년 한시적이라는 조건으로 기러기 생활을 감수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정호/이관우/김동윤/이상은/이고운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