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로 시 쓰는 내게는 어머니란 모국어 자체다. 내방가사를 짓고 암송하던 우리 어머니만큼 우리말을 맛깔나게 구사한 이는 본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냥 보라색이 아닌 '오동보라색',그냥 빨강이나 분홍이 아닌,진달래꽃과 연달래꽃의 사이색을 '뽈또그레'라고 하셨다. 나의 시인의 길도 "지는 게 이기는 것" "유약이 승강강(柔弱 勝强剛)" "상선약수(上善若水)"… 등등 어머니의 무수한 말씀이 길 잡아 준 게 아닐까 한다. 초등학교 입학 이틀 만에 외조부께 들켜 규방에 갇혀 익힌 성현의 글은,미국박사 나를 만 배 능가하는 것을.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우리집의 중심이었다. 조모가 안 계셔서였는지 조부님까지도 귀가하시면 으레 "에미 집에 있제?" 하고 사랑에 드셨다. 우리집만이랴.어떤 가정도 그 중심을 잡아주는 이는 모성인 주부일 게다. 엄마가 없으면 숙제도 되질 않았다. 고(故) 일석 이희승 선생은 아내란 본래 '안해'였으니,집안의 해,즉 태양이 어원이라 하셨다. 사투리로는 어메 어무이 엄니였고,글줄이나 읽는 집에서는 모친 자친 자당이었으나,요즘엔 엄마 어머니인 호칭!

"하느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시지 않는다,그래서 어머니를 만들어주셨다"는 유대인의 미드러시처럼 엄마는 하느님 대신이다. 며느리,아내,엄마이기도 한 집안의 모성,이름이 곧 어머니이고,사명이 곧 가족들 평안인,평생 무급의 무권리 무한 책임자,사랑이신 하느님이 자기 대신 파견한 어머니,시부도 남편도 아이도 대문을 들어서며 먼저 찾는 집지킴이는,아파서 병원에라도 가고 없으면 온 가족들이 불같이 화내고 불평하며 불안상태가 되고 만다.

그래서 엄마는 아파도 안되고 볼일 보러 외출해도 안 되는,오로지 가족을 위해 집안에 갇혀 끝도 없는 헌신과 희생으로 살아야 되는 줄 알았던 어머니,그런 모성이 없는 가정도 늘어간다. 어머니 없어 해뜨지 않는 흐린 날은 궂은날이 된다. 적절한 예가 될진 몰라도,육영수 여사가 살아있었더라면 박정희 정권의 말로가 달라졌을 것이라고들 하는 이유도,국가를 가정의 확대개념으로 인식한 게 아닐까.

예부터 모성은 신성이었다. 부여와 고구려의 무천제(舞天祭)에서 주몽의 모 유화는 곡모신(穀母神)이었고,백제의 온조와 비류의 모 소서노도 정견모주(正見母主)였다. 박혁거세도 사소 파소 사파소 등으로 알려진 어머니가 키웠다. 이렇게 우리 역사에는 어머니란 여신(女神)이었다.

모성의 신성으로 창조주도 아버지 하느님 아닌 어머니 하느님이 옳다는 주장도 괴변만은 아니다. 인간중심적 도덕성을 상위 도덕성으로 본 길리건은 어머니 예수님이라고 했을 정도로,도덕성의 최고를 모성으로 보았다. 부성애란 구약성경 중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귀한 아들 이삭의 목숨을 요구한 야훼께,믿음의 증명으로 아들을 바치는 것이었지만,솔로몬의 재판에서 자기 아기를 포기하는 고통을 감내하면서도,가짜 엄마에게 아기를 넘겨줌으로써 자기 아기를 살려내는 친모의 희생적 모성애가 더 도덕적이라고 했다.

종교에서 신과의 가족관계 호칭이나,성모 마리아나 관세음보살의 모성을 강조하는 까닭도 모성애가 더 상위개념이며 희생적이기 때문일 게다.

여성성의 최고는 모성이다. 시인 정진규가 "연인은 여자로 와서는 어머니가 되더라"라고 갈파한 것도,여성성의 승화는 모성이기 때문일 게다. 본래 어머니날이었던 어제가 어버이날이다.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이름은 어머니이고,가장 정겨운 이름은 외할머니다. 어머니란 끝없이 희생적이기 때문에 가장 복된 이름 아닐까. 인류 구원을 위해 자진 순교한 예수의 모성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