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가 비밀스럽게 쓰던 궁중 화장품과 피부관리법에 대한 전설을 찾아라."

한방 화장품 '후' 출시 직후 LG생활건강에 떨어진 특명이었다. 당시 한방 화장품 시장은 아모레퍼시픽의 독무대였다.

세상이 놀랄만한 화장품을 만들어야 했다. 차별화를 위해 이 회사가 선택한 것은 '궁중에서 로열 패밀리가 쓰던 화장품'이란 컨셉트였다.

옛날 로열 패밀리의 생활상부터 연구하기 시작했다. 철저한 고증이 수반돼야 제대로 된 이야기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 한방 화장품과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고급화 전략을 추가했다. 원료를 물에 섞어 타는 희석방식이 아니라 녹용,산수유,당진,사향 등 한약재에서 필요한 성분만 골라내 추출하는 방법을 택했다.

● 68만원짜리 '환유고'도 불티

이렇게 해서 내놓은 업그레이드 제품이 '히스토리 오브 후'였다. 아예 기획 단계부터 스토리텔링을 염두에 둬 '후의 이야기'라는 뜻으로 작명했다. 신비에 싸인 왕실문화,현대적으로 접근한 동양의학,왕후에게만 전해져 온 궁중비방.'단기 4335년,이 시대 왕후들을 위한 한방 화장품'의 브랜드와 제품 색상은 골드였다. 디자인도 호박과 연꽃의 전통문양을 형상화했다.

국내에서 가장 비싼 화장품인 68만원짜리 '환유고(還幼膏)'도 그렇게 나왔다. 어린 아이의 피부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중년 여성을 타깃으로 잡은 화장품이었다. 광고는 숙종을 사이에 두고 장희빈과 인현왕후가 벌이는 갈등을 소재로 영화처럼 만들었다. 모델은 탤런트 이영애를 썼다.

마케팅도 스토리텔링으로 승부했다. 방송작가에게 의뢰해 '후의 비밀'이라는 소설을 쓰게 했다. 잡지에 6회 분량으로 연재된 일종의 '매거진 드라마'였다. 궁중의 하루와 왕후의 피부관리법 등을 흥미롭게 구성했다. 인터넷 사이트도 만들었다.

정교한 얘기에 소비자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혼자서 하나를 다 사기에는 부담스러우니 세 명이 모여 한 제품을 구입해 나눠갖는 화장품"이란 구전이 확산됐다. 어느덧 '히스토리 오브 후'는 '여성들이 갖고 싶어하는 고급 화장품'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론칭 첫 해에만 '환유고' 크림 1만2000여개가 팔렸다.

이처럼 스토리텔링은 '전통'과 접목될 때 큰 힘을 발휘한다. 익숙한 모티브에 창작자의 상상력을 가미하면 새로운 스토리가 탄생하는 것이다. 대중은 늘 '판타스티시즘'에 끌린다. 누구나 이야기 속의 주인공을 닮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고전과 민담,구비문학 등은 모두 스토리텔링의 훌륭한 소재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스코틀랜드 전설에는 인간과 비슷한 '트롤'이 등장한다. 이들은 노르웨이 극작가 입센의 희곡 《페르 귄트》로 널리 알려졌고 140년이 지난 지금도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등 각종 판타지 소설과 영화에 등장한다.

● 옛것에 재미 · 감동 입혀야

옥스퍼드대 영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톨킨은 자신처럼 신화적인 소설과 시를 쓰는 사람들을 모아 '잉클링스(The Inklings:모호하고 완성되지 않은 암시와 아이디어를 찾는 사람들)'라는 모임을 만들어 북유럽의 신화와 서사시를 연구하고 토론했다. 이 모임에서 나온 아이디어와 이야기를 모아 요정,마법사,용,호빗이 이끌어가는 3부작 서사소설 《반지의 제왕》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영화,게임 등으로도 만들어졌고,2조원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