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OX
마크 레빈슨 지음 | 김동미 옮김 | 21세기북스 | 503쪽 | 2만5000원


'멋대가리 없이 생긴 직육면체 상자는 어떻게 한국경제를 바꿨을까.'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마크 레빈슨이 <<THE BOX>>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던진 질문이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강철박스가 국제무역과 세계 물류에 끼친 영향은 얼마나 될까.

1972년 한국 최초의 컨테이너 운항선인 인왕호가 한·일 항로에 첫선을 보였다.

5년 뒤 한진그룹은 본격적인 컨테이너 전용 선사인 한진해운을 창립했고 1979년부터는 태평양을 가로지르며 세계 각지를 누비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한국의 무역 패턴이 확 바뀌게 됐고 산업구조도 그만큼 고도화됐다.

의류와 직물의 수출 비중이 43%에서 20% 수준으로 줄어들고 전자제품과 철강 등 첨단 제품의 비중이 늘어났다.

1969년 미국의 수입품 가운데 한국산 비율은 1%도 채 되지 않았고,장래의 무역 파트너 후보 국가 중에서도 한국은 파키스탄이나 페루보다 한참 뒤처졌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 10위권의 교역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컨테이너는 조선산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 등 한국의 조선기업 빅3는 세계 컨테이너 생산능력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다.

지구촌을 누비는 컨테이너선 중 약 800척이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또 하나.

컨테이너와 불가분의 관계인 항구의 발전도 뒤따랐다.

부산항의 컨테이너 화물량은 1970년대 이후 10년간 700%나 급증했고 이후 10년간 다시 3배가 늘었다.

1995년에는 세계 5대 컨테이너 항구로 당당하게 올라섰고 2006년엔 길이 12m 규모의 컨테이너를 연간 600만개 이상 소화하는 매머드 국제항으로 자리잡았다.

컨테이너 운송에 부정적이던 뉴욕이나 런던 같은 항구가 물류 유통에서 뒷걸음질친 데 비해 컨테이너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부산이나 시애틀 등은 물류 허브의 신흥 강자로 부상했다.

영국의 펠릭스토항처럼 컨테이너 덕분에 새로 생긴 거점 항구들도 속출했다.

'박스' 때문에 지역,국가경제의 흥망이 좌우된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이 가난한 나라에서 지금처럼 세계적인 무역국가로 거듭난 것은 이 '단순하고 멋대가리 없이 생긴 직육면체 상자'가 예기치 않게 낳은 수많은 결과 중의 하나"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세계 최초의 컨테이너선은 한국보다 20여 년 빠른 1956년 미국 뉴저지주 뉴어크에서 출항했다.

그해 4월 유조선을 개조한 아이디얼X호가 58개의 컨테이너를 싣고 휴스턴으로 향했다.

이 역사적인 항해를 주도한 사람은 트럭 기사 출신의 말콤 맥린이었다.

'컨테이너 화물운송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빌린 트럭 한 대로 화물을 운송하던 1인 기업에서 출발해 굴지의 해운회사인 시랜드를 설립한 뒤 최초의 컨테이너 운항을 창안하고 실행했다.

지난해 '포브스'지가 그를 '20세기 후반 세계를 바꾼 인물 15인'에 선정한 이유도 이 같은 '혁명적 업적'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디얼X호가 운항을 시작한 뒤 컨테이너가 곧바로 물류 시스템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컨테이너 사용으로 일자리가 줄어든다며 줄지어 파업을 벌였고 벌크 화물을 취급하는 구식 항구들의 반발도 거셌다.

컨테이너 규격을 표준화하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갈등이 빚어졌다.

이 모든 것을 해소해 준 것은 뜻밖에도 전쟁이었다.

베트남 전쟁에 나선 미국이 대규모의 군용물자를 전쟁터로 수송하는 데 컨테이너만큼 유용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컨테이너는 미군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국제 물류의 중심 축으로 급부상했다.

이는 또 해상으로 운송된 컨테이너를 내륙으로 실어나르기 위한 철도 산업을 키웠으며 컨테이너 사용을 뒷받침할 수 있는 시스템과 장비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를 통해 전 세계의 소비자들에게도 온갖 상품을 싸게 구입할 수 있도록 해줬다.

이 책은 컨테이너 박스의 탄생과 도입,부두 노동자들의 반발,규격의 표준화와 시스템의 안착,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한 비약적 발전,해운회사와 화물 주인들 간의 다툼 등을 입체적으로 조명한 최초의 역사서다.

방대한 자료와 세밀한 연구 결과에 장편 르포 같은 재미까지 겸비했다.

이는 저자가 경제학자인 동시에 저널리스트이기 때문에 가능한 성과다.

전문서가 갖추지 못한 대중성,탐사보도 이상의 깊이를 동시에 갖춘 것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컨테이너 박스를 가지고 경제·사회·정치적 영향을 이만큼 깊숙하게 비춰냈다는 게 더욱 놀랍다.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