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 회장의 11일 '경영체제 쇄신 검토' 발언은 향후 '삼성 특검' 정국 이후 삼성의 진로에 격변을 예고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 회장은 이날 특검팀 조사를 받고 귀가하는 길에 미리 준비한 메모에 의지한 채 "이번 일을 계기로 그룹 경영체제와 경영진의 쇄신 문제를 깊이 생각해볼 것"이라는 요지로 기자들에게 말했다.

이 말의 속뜻에 대해 삼성측은 즉각 '이 회장 말씀에 대한 삼성 입장'이라는 요지의 참고 코멘트를 통해 "특검 결과 만일 잘못이 지적되면 그 분야에 대해 제도개선이나 후속조치를 해서 새롭게 태어나겠다는 의미"라고 풀이했다.

'잘못이 지적되면'이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특검팀이 적어도 의혹을 사실로 확인하는 여러 수사결과를 토대로 최고위급을 포함한 핵심 관계자들이 사법처리될 가능성이 커 보이기 때문에 이에 따른 삼성의 제도개선이나 후속조치는 당연히 수반될 것으로 관측된다.

그렇다고 볼 때 당장 삼성에서 제도개선이라는 딱지를 붙일만한 것으로는 전략기획실의 해체나 대수술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 업계의 지적이다.

전략지원팀, 인력지원팀, 기획홍보팀 등 3개팀을 두고 있는 전략기획실은 각 계열사의 전략운용을 총지휘하면서 삼성의 자금 흐름과 지배구조를 관통하는 '중추 조직'이지만 특검팀의 칼끝이 닿은 불.편법 경영권 승계, 비자금.로비, 차명계좌 의혹 등 의혹사안마다 엉켜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건희 회장과 아들 이재용 전무로 이어지는 경영 승계구도를 완성하고 '제왕적 총수 휘하에 선단식 경영' 적폐를 이어온 온상이라고 일부 시민단체들은 전략기획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맥락에서 삼성은 어떤 식으로든 전략기획실 이슈를 심각하게 고민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삼성의 전략기획실은 이미 여느 그룹과 마찬가지로 회장 비서실, 구조조정본부 등의 변화상을 겪어왔다.

삼성은 이에 맞물려 각 계열사 독립경영체제를 강화하거나 최근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업계의 지주회사 체제를 활성화하겠다는 취지의 정책방향이 설정되고 있는 데 발맞춰 지주회사로의 전환을 검토해 나갈 가능성도 엄존한다.

삼성이 만약 지주회사 코스를 밟는다면 최태원 회장 → SK C&C → SK 홀딩컴퍼니(지주사) → 자회사 → 손자회사로 이어지는 SK그룹의 구도와 비슷하게 이재용 전무 등 오너 → 에버랜드 → 삼성생명(지주사) → 자회사 → 손자회사로 짜일 것이라는 설익은 시나리오도 재계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삼성은 이 경우 과거 SK가 지주회사를 꾸릴 당시 SK㈜를 지주사인 SK㈜와 사업 자회사인 SK에너지로 분할한 것처럼 삼성생명을 인적.물적 분할하는 방안을 검토해 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에버랜드 → 삼성생명 → 삼성전자 → 삼성카드 등으로 연결되는 환상형 출자구조를 해소하면서 삼성생명이 상장하게 되면서 생기는 자금 여력 등을 삼성전자 등 자회사 지분 확보에 필요한 '실탄'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삼성은 자연스럽게 '이건희-이학수' 체제를 '이재용+α' 체제로 옮겨가는 수순을 밟게 될 것이라는 전망에도 재계 인사들은 무게를 싣고 있다.

일부 핵심 임원들의 기소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고위 수뇌 인사 등을 통해 핵심부의 물갈이 등 후속조치가 뒤따르면서 당연히 중.장기적으로 그려지는 그림인 셈이다.

물론 이날 이 회장이 "도의적이든 법적이든 제가 모두 책임을 지겠다"고 밝힌 뒤 '기소되면 일선에서 후퇴하는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생각해봐야죠"라고 대답하면서 여지를 남긴 데 대해 삼성측은 "회장의 퇴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톤다운하고 나섰지만 이 회장 자신이 특검 결과와 여론의 향배, 그리고 삼성의 미래를 고려하면서 어떤 결단을 내릴 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재용 시대'로 가는 큰 구도에 굴곡만 없다는 확신이 서면 이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이명희 회장이 뒤로 앉은 채 아들 정용진 부회장과 전문경영인인 구학서 부회장의 '투톱' 경영시스템을 무리없이 이끌고 있는 신세계 모델을 따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방안 가운데 금전적 기여를 포함한 사회공헌 확대는 후속조치에 포함되지 않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건희 회장이 장기 외유 끝에 '8천억원 사회환원' 방침을 내놓은 것이 불과 2년 전이어서 "또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한다"는 역풍이 일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중심으로 일고 있는 기업의 사회적책임(CSR) 강화 붐에 발맞춰 사회적 역할을 다하기 위한 제도적 개선을 모색할 가능성은 있다는 것이 많은 재계 관계자들의 전망이다.

이런 가운데 이 회장이 이날 "모든 게 제 불찰이다.

제가 모두 책임지겠다.

아랫사람한테는 선처를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한 데 대해 특검팀 주변에서는 특검팀의 비자금ㆍ경영권ㆍ로비 의혹 수사에서 본인을 포함한 이학수 부회장 등 핵심 관계자들이 사법처리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에 대비, 특검의 수사결과 발표 이후 사법처리 파장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고형규 기자 uni@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