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라즈(shiraz)라는 포도 품종은 호불호(好不好)가 뚜렷한 품종이다.말린 자두향 속에 은근하게 비치는 후추향 혹은 가죽향이 때로는 와인을 처음 마시는 사람들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하지만 그 톡 쏘는 매력 덕분에 마니아가 많은 품종이기도 하다.

국내에선 쉬라즈 하면 호주산 와인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저렴하고 마시기 쉬운 호주산 쉬라즈로 만든 와인이 꽤 많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사실 쉬라즈라는 이름은 BC 4000년에 세워진 이란의 도시에서 비롯됐다.이 지역의 토착 포도에 AD 2세기쯤 쉬라즈라는 이름이 붙기 시작했는데,13세기 십자군 전쟁에 참전한 프랑스의 가스파르 드 스테랑베르그라는 기사가 귀향하면서 쉬라즈 씨앗을 갖고 돌아와 프랑스 남부 론 계곡에 심었다고 한다.

이 기사가 정착한 곳이 바로 북부 론 지방 최고의 와인을 생산하는 에르미타주(Hermitage). 은둔자라는 뜻의 에르미타주에서 그는 예배당(라 샤펠.La Chapelle)을 짓고 와인을 만들었다.크리스티 경매에서 1961년산이 한 병에 2000만원에 팔리며 20세기 와인의 3대 신화(나머지는 '로마네콩티'와 '페트뤼스')로 기록된 '라 샤펠'의 기원은 이렇게 시작됐다.

'라 샤펠'은 1919년 폴 자불레 가문의 소유가 되면서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이 와이너리는 론 지역에서만 '라 샤펠'을 포함해 28종의 와인을 생산,론의 대명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특히 사암동굴에 지은 와인 셀러는 미리 예약한 그룹만 관람할 수 있는,와인 마니아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관광 코스이기도 하다.

1980년 이후의 '라 샤펠' 중에서 뛰어난 빈티지를 꼽으라면 1985년산을 들 수 있다.이 해에 생산된 프랑스 와인 중에서 전문가들은 론 북부,특히 에르미타주를 최고로 친다.로버트 파커는 적어도 2025년까지 이 와인이 자기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1989년과 1990년산도 애호가들의 폭발적인 수요로 경매 가격이 매년 치솟고 있다. 가격 대비 품질이 좋은 빈티지로 폴 자불레 관계자는 이달 중순 한국에서 진행했던 빈티지별 테이스팅에서 1988년산을 추천했다.그 이유는 "2차 향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꽃향기가 매력적"이라는 것.1999년산은 평론가 사이에서 가장 이견이 엇갈리는 빈티지라는 점이 흥미롭다.로버트 파커는 89점을,와인스펙테이터는 97점을 줘 상반되게 평가했다.

에르미타주에서 나온 '라 샤펠'은 보통 20만원을 훌쩍 넘는다.에르미타주 앞에 '크로제(Crozes)'라는 단어가 붙은 와인은 좀 더 저렴하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