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3월 일본 주재원으로 도쿄에 부임한 A상사 L차장은 걱정이 많다.일본 학교에 보낸 초등학교 4학년인 외아들의 공부 때문이다.아이가 처음 일본 학교에 갔을 때 일본어를 몰라 고생하긴 했지만 수학은 첫 시험부터 90점 이상을 받아왔다.지금은 거의 만점이다.언어 문제도 6개월 만에 극복해 지금은 별 어려움이 없다.

학교 성적도 좋은데 무슨 걱정이냐 싶겠지만 문제는 바로 성적이 좋은 이유다.아이 성적이 좋았던 건 일본에서 배우는 4학년 과정이 대부분 한국에서 3학년 때 배운 내용이기 때문이다.

일본 학교에선 숙제도 거의 내주지 않는다.아이는 방과 후 집에 돌아오면 TV나 게임에 빠지기 일쑤다.이러다 한국에 돌아가면 어쩔지 걱정이다.최근 전임자 아이가 한국에 돌아가 다른 아이들 수준을 따라잡지 못해 고생한다는 얘기를 듣고 더 심란해졌다.

유토리(여유) 교육의 문제점은 일본에 3~5년 근무하다 돌아가는 한국 주재원들이 가장 잘 안다.방과 후 숙제에다 영어ㆍ수학 학원 등으로 쉴 틈 없이 내몰리는 한국과는 너무 다른 교육 환경을 피부로 느끼는 탓이다.한국 교육이 아이들을 혹사시킨다는 생각도 들지만,그렇다고 공부 습관을 키워주지 못하는 일본 교육도 대안은 아니란 생각으로 L차장은 머리가 복잡하다.

유토리 교육의 취지는 훌륭하다.'여유 교육'이란 뜻으로 학생의 자율성과 종합 인성교육을 중시하는 것이다.1970년대부터 개념이 도입돼 2002년 공교육에 본격 도입된 유토리 교육 슬로건은 '스스로 배우고 생각하는 힘을 키운다'이다.이를 위해 토요일 수업을 없애고,학교에서의 학습량을 약 30% 줄였다.초등학생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연간 100시간가량 수업량이 적어졌다.

문제는 학생들의 창의력을 길러준다는 명분으로 공부를 덜 시켰다는 것.이는 불가피하게 학력 저하를 불러왔다.더 심각한 건 유토리 세대가 지식을 활용하는 응용력마저 떨어진다는 점이다.응용력 향상은 유토리 교육의 가장 중요한 학습 목표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작년 4월 전국의 초등학교 6학년,중학교 3학년 220만명을 대상으로 대규모 학력 테스트를 실시했다.국어와 수학 두 과목을 각각 '기초지식'과 '지식응용'으로 나눠 시험을 본 결과 기초지식의 정답률은 80%에 달했지만 응용력은 60~70%에 그쳤다.

정부의 유토리 교육 방침에도 불구하고 소수 정예 교육,지방자치단체의 독자 학력시험 등 학력 향상을 위해 노력해 온 아키타현의 평균 성적이 가장 높았다.반면 유토리 교육에만 충실했던 오키나와현은 전국 꼴찌였다.

유토리 교육의 학력 저하는 국제 비교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난다.작년 말 일본사회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2006년 국제학습성취도조사(PISA) 결과에 충격을 받았다.일본 학생들이 과학과 수학 응용력,독해력 등 모든 부문에서 이전보다 순위가 크게 떨어졌기 때문.세계 57개국의 15세 학생 약 40만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 조사에서 일본 고교생은 수학적 응용력이 3년 전 조사 때보다 네 계단 떨어진 10위로 추락했다.

과학적 응용력은 2위에서 6위로 하락했다.독해력도 14위에서 15위로 한 계단 내려앉는 등 전 부문에서 순위가 후퇴했다.일본인들은 그동안 최고라고 자랑해온 이과 계열에서조차 하위로 밀려난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 만 15세의 일본 학생들은 주입식 교육을 탈피한 유토리 교육을 받은 세대다.이번 학력 테스트를 받은 고교 1년생 6000여명은 유토리 교육이 시작된 2002년에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더 큰 문제는 전망도 밝지 않다는 것.이번 조사에서 '과학에 학습 흥미가 있는냐'는 질문에 일본 학생의 50%만이 '그렇다'고 답했다.조사대상 57개국 중 최하위권인 52위였다.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