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 회장은 '꿈꾸는 로맨티스트'다.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일구어 놓고도 여전히 꿈꾸기를 그치지 않고 있다.

그의 눈길은 글로벌 일류기업을 넘어 누구도 밟아본 적이 없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

그곳은 블루오션일 수도,천지를 개벽시킬 수 있는 신천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회장의 꿈이 마냥 달콤한 것만은 아니다.

'샌드위치 위기론'에서도 비쳐지듯이 밤잠을 설치는 중압감을 견뎌야 한다.

이 회장은 20만 임직원을 이끄는 그룹 총수로서 숙명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다.

이 회장은 항상 미래를 경계하고 두려워한다.

생래적으로 비관파에 가깝다.

하지만 이 회장이 진정으로 이 시대 기업인의 마지막 '낭만파'로 불리는 이유는 비관을 긍정과 낙관으로 바꾸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노키아를 두려워하면서도 휴대폰 사업에 승부를 걸었고 소니와 도시바의 힘을 알면서도 디지털TV와 낸드플래시메모리 사업을 독자적으로 추진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회장의 머리 속에는 무수한 아이디어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아이디어의 끊임없는 변형과 파괴,이어지는 재창조의 과정을 통해 이 회장은 미래를 맞이할 꿈과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담금질한 생각을 '화두'로 던진다.

이 회장이 주창하고 있는 '창조경영'은 어떤 틀로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 자체가 목표이지 않지만 특정한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론도 아니다.

이 회장 스스로 어떠한 가이드라인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 회장이 창조경영을 들고 나온 생각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자리 잡고 있다.

하나는 '등대 무용론'이고 나머지 하나는 '도강(渡江) 불가론'이다.

과거 삼성이 인텔 마이크로소프트 소니 도시바 등과 같은 초일류 기업들을 따라잡으려던 시절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이들 기업은 삼성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일종의 등대였다.

앞선 기업들이 개척한 뱃길을 따라가면 적어도 위험하진 않았다.

하지만 세계적인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지금,삼성은 칠흑 같은 밤바다에 홀로 떠 있다.

등대의 강렬한 불빛 대신 무심한 별빛들만 쏟아지는 바다 말이다.

수많은 경영학자들이 만들어놓은 로드맵과 혁신기법들도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폭풍우에는 힘을 쓸 수가 없다.

창조경영의 출발은 그동안 의지해왔던 등대가 사라졌다는 점을 깨닫는 데서 시작된다.

'도강 불가론'은 경우에 따라 선박까지도 버려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생각이다.

내일은 어제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온다.

당연히 어제까지 해온 방식으로 내일을 맞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어제 타고 온 배로 내일 건너야 할 강을 건널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선박 교체를 생각하는 마당에 나침반과 지도도 모두 버려야 한다.

우리 중에 누구도 미래를 미리 가볼 수가 없다.

현재 시간보다 0.0001초 후의 극한적인 시간이라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앞으로 삼성이 가는 길은 전인미답의 뱃길이다.

알지 못하는 세계,불확실성이 파도처럼 넘실대는 곳에서는 생존을 위한 영감과 직관이 중요하다.

합리적 이성보다는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대응능력,무한에 가까운 창의성과 상상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영감과 직관은 그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스스로 훈련하고 단련해야 한다.

이제 독자 여러분들은 이 회장이 창조경영이라는 화두를 던져놓고 끝내 세부 지침을 주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상상력이 나래를 펴야 할 무대에 특별한 로드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목표와 방법론을 특정하는 순간,창조경영은 일종의 교조주의에 빠져 그 생명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지난 10여년간 "인재와 기술만 있으면 두려울 게 없다"고 '준비경영'을 강조해온 이 회장은 이제 창조경영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모색하고 있다.

나침반도,등대도 없는 항해지만 결코 정처 없는 표류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회장의 고뇌요,삼성의 고민이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