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무라카미 다카시. 그는 이런 표정과 자세를 10분 넘게 유지했다. 중간중간 한쪽 발을 들어가며 귀여운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무라카미 다카시. 그는 이런 표정과 자세를 10분 넘게 유지했다. 중간중간 한쪽 발을 들어가며 귀여운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지난 26일 부산시립미술관. 덥수룩한 머리에 기괴한 모양의 분홍색 모자를 뒤집어쓴 늙수그레한 남성이 작품 앞에 서더니 손으로 ‘브이(V)’ 자를 그렸다.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주인공은 이날 개막한 전시 ‘무라카미 좀비’의 주인공 무라카미 다카시(61). 전국에서 모인 100여 명의 기자는 그를 담기 위해 10분 넘게 셔터를 눌러댔다. 여기에 몰래 들어온 일반 관람객들이 가세하면서 작품이 손상될 뻔한 ‘비상 상황’도 벌어졌다. 촬영 내내 활짝 웃던 다카시가 유일하게 정색한 순간이었다.
작품이 손상될 위기에 처하자 표정이 굳은 무라카미 다카시.
작품이 손상될 위기에 처하자 표정이 굳은 무라카미 다카시.
이 모든 걸 지켜본 미술계 관계자들은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이라고 했다. 이런 이유에서다. 다카시는 세계적인 작가다. 그런 전시가 서울이 아니라 지방 미술관에서 열렸다. 상업성·선정성·왜색 등 국내 관객이 싫어할 만한 요소를 다 갖췄는데도 반응은 ‘역대급’으로 뜨겁다. 일반 개막일인 27일 이후 미술관 로비는 전시에 입장하려는 관람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이번 전시가 한국 미술계에 던진 화두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①관대해진 관객

무라카미 다카시의 시그니처 캐릭터인 웃는 꽃으로 장식된 전시실./부산시립미술관
무라카미 다카시의 시그니처 캐릭터인 웃는 꽃으로 장식된 전시실./부산시립미술관
미술관은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들을 ‘귀여움’ ‘기괴함’ ‘덧없음’ ‘원상’ 등 네 주제로 구분했다. ‘귀여움’ 코너는 국내에도 잘 알려진 웃는 꽃 모양 캐릭터 ‘카이 카이 키키’를 비롯해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들로 구성했다. 자신이 좀비화(化)돼 썩어가는 모습을 묘사한 조형 작품 ‘무라카미 좀비와 폼 좀비’는 거부감이 들 정도로 징그럽고, ‘미스 코코’ 등 선정적인 작품들이 있는 전시실은 보기가 영 민망하다. 이 전시실은 미성년자 입장이 불가능한 ‘19금 전시실’이다.
무라카미 다카시의 가로 5m, 세로 3m에 이르는 대형 회화 ‘붉은 요괴, 푸른 요괴와 48나한’. 불교 회화인 500나한도에 나오는 두 도깨비를 통해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표현했다.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무라카미 다카시의 가로 5m, 세로 3m에 이르는 대형 회화 ‘붉은 요괴, 푸른 요괴와 48나한’. 불교 회화인 500나한도에 나오는 두 도깨비를 통해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표현했다.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일본 불교를 소재로 한 거대한 그림 ‘붉은 요괴, 푸른 요괴와 48나한’, 일본 전통문화에 자주 쓰이는 원 문양을 모티브로 한 ‘젠 엔-소 플래티넘’은 일본풍이 매우 짙다. 이런 작품이 걸린 전시에는 ‘왜색 논란’이 으레 따라붙었지만, 이번에는 없다. 미술계 관계자는 “현대 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작가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비판하는 모습은 거의 없어졌다”며 “작품의 선정성과 기괴함 등에 대한 반감도 많이 내려간 것 같다”고 했다.
29일 부산시립미술관 로비가 무라카미 다카시의 전시를 찾은 관람객들로 가득차 있다.  /무라카미 다카시 SNS 캡처
29일 부산시립미술관 로비가 무라카미 다카시의 전시를 찾은 관람객들로 가득차 있다. /무라카미 다카시 SNS 캡처
이번 전시는 ‘컬렉터’가 전시의 흥행을 이끄는 요소가 된 요즘 미술 트렌드도 보여줬다. 전시 맨 처음에 나와있는 작품은 높이 3m, 너비 4.5m에 달하는 대작 ‘727 드래곤’인데, 소장자는 권지용(지드래곤)이라고 적혀 있다. 빅뱅 동료인 최승현(탑)의 소장 작품도 전시장 한편에 걸려 있다.

②높아진 한국 미술 위상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들의 보험가액은 980억원이다. 서울의 웬만한 유명 미술관도 부담스러워할 규모다. 이만한 전시를 지역 국공립미술관에서 단독으로 유치했다. 한국 미술계의 저변이 그 만큼 넓어졌다는 의미다. 세계적인 예술가도 한국의 지역 미술관에 자신의 작품을 맡길 정도로 한국의 미술 인프라를 높이 평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라카미 다카시의 '스파클/탄탄보:영원'. 한편으로는 귀엽고 한편으로는 기괴한 작풍이 잘 들어가 있는데, 가까이서 보면...
무라카미 다카시의 '스파클/탄탄보:영원'. 한편으로는 귀엽고 한편으로는 기괴한 작풍이 잘 들어가 있는데, 가까이서 보면...
괴물에 잡아먹힐 위기인데도 웃고 있는 꽃들이 보인다. 그 웃음마저도 어딘가 섬뜩한 구석이 있다. 전쟁과 환경 파괴 등 여러 재앙이 닥치고 있는데도 마냥 밝게 웃고 있는 개인들의 무지를 표현한 것이다.
괴물에 잡아먹힐 위기인데도 웃고 있는 꽃들이 보인다. 그 웃음마저도 어딘가 섬뜩한 구석이 있다. 전쟁과 환경 파괴 등 여러 재앙이 닥치고 있는데도 마냥 밝게 웃고 있는 개인들의 무지를 표현한 것이다.
세계적인 작가 이우환이 이번 전시를 주선했다는 건 한국 작가의 높아진 위상을 보여준다. 다카시는 “제가 매우 존경하는 작가인 이우환 선생님이 전시에 초대해주셨다는 점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③여전히 미흡한 인프라·행정

박수 칠 일만 있는 건 아니다. 당초 이 전시는 지난해 9월 개막해 다섯 달 동안 열릴 예정이었지만, 작품을 설치하던 지난해 여름 미술관 건물에 비가 새면서 작가가 전시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술계 관계자는 “한국 제2의 도시 부산을 대표하는 미술관이 기본적인 항온·항습도 못 한다는 건 국제적인 망신거리”라고 했다. 미술관 측이 이 같은 사실을 관객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고 쉬쉬하면서 부산 전시를 보러갔다가 헛걸음하는 사람들도 나왔다.
무라카미 다카시가 고안한 캐릭터들. 작가 본인이 쓴 기괴한 모자도 이 캐릭터들 중 하나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무라카미 다카시가 고안한 캐릭터들. 작가 본인이 쓴 기괴한 모자도 이 캐릭터들 중 하나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기혜경 부산시립미술관장은 “부산시립미술관을 비롯한 1세대 지역 미술관 대부분이 리노베이션이 필요한 상태”라며 “대대적 보수공사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미술관은 전시가 연기된 데 대한 미안함을 담아 무료로 개방했다. 전시는 오는 3월 12일까지.

무라카미 다카시는 오타쿠 문화를 예술의 경지로 올린 ‘日 미술 3대장

현존 작가 중 훗날 세계 미술사에 남을 만한 인물은 몇이나 될까. 일본에 선 세 사람이 후보로 꼽힌다. 쿠사마 야요이(94), 나라 요시토모(64), 무라카미 다카시(61·사진). 이 중 가장 의견이 분분한 인물은 다카시다. 일본의 ‘오타쿠 문화’를 비튼 선정적이면서도 기괴한 작풍과 예술가인지, 상업 디자이너인지 헛갈리게 만드는 노골적인 장삿속 때문이다. 자신은 감독 역할만 하고 작업은 200여 명의 직원에게 맡긴다는 점에서 ‘공장장’이란 비아냥도 듣는다.

그럼에도 다카시가 세계 미술계의 거물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술계에서도 악평보다 호평이 많다. 세계적인 작가이자 평론가 이우환도 “얼핏 보면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고 화려하지만, 다시 보면 강한 비판성이 감춰져 있는 패기 넘치는 작품세계”라고 칭찬했다.
로비의 조형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무라카미 다카시. 그의 이런 노력을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다. 그의 컨셉부터가 '순수예술과 상업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직원 200여명을 거느린 사장님이기도 하다. 이렇게 언론매체에 등장하는 것은 작품 활동과 회사 홍보를 동시에 하는 셈이다.
로비의 조형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무라카미 다카시. 그의 이런 노력을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다. 그의 컨셉부터가 '순수예술과 상업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직원 200여명을 거느린 사장님이기도 하다. 이렇게 언론매체에 등장하는 것은 작품 활동과 회사 홍보를 동시에 하는 셈이다.
상업적인 영향력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루이비통 등 명품 브랜드, 카니예 웨스트 등 세계적인 스타들과 수시로 손을 맞잡는다. 그가 고안한 활짝 웃는 꽃 ‘카이카이 키키’는 국내에서도 ‘짝퉁’이 판칠 정도로 인기다.

다카시는 자극적인 작품을 만드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의 고급문화는 세계 미술시장에서 별 존재감이 없지만, 만화·애니메이션 등 오타쿠 문화는 세계 최강이다. 그래서 나는 오타쿠 문화를 고급 예술의 반열에 올리는 동시에 기괴하고 과장된 표현을 통해 오타쿠 문화의 한계를 비판하고 있다. 이를 통해 순수예술의 문턱을 낮췄다고 자부한다. 이런 작품이 즐길 만한지는 관람객이 각자 판단하면 된다.”

부산=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