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즐로 호머 ‘상어 잡기’(1885)
윈즐로 호머 ‘상어 잡기’(1885)
“뱃전 너머를 굽어보면 상어들이 음산하고 검은 물속에서 뒹굴고 몸을 뒤척이며 죽은 고래 살을 사람 머리통만큼 커다란 공 모양으로 도려내는 걸 볼 수 있었다. 상어들의 이런 묘기는 거의 기적처럼 보인다. 도무지 공략할 틈이 없어 보이는 고래의 표면을 어떻게 그토록 완벽한 대칭으로 한 입씩 도려낼 수 있는지, 이 문제는 우주의 신비로 남아있다.”

최고 해양문학으로 평가받는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백경)>을 펼치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멜빌이 상어가 고래 사체를 뜯어먹는 장면을 현장감이 넘치게 묘사할 수 있었던 비결은 포경선을 타고 남태평양을 항해한 경험이 소설에 반영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가장 위대한 해양화가로 꼽히는 윈즐로 호머(1836~1910)도 멜빌처럼 바다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고, 생생한 현장 경험을 토대로 해양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업적을 남겼다.

호머는 화가로 활동하던 초기에 미국 주간지 하퍼스위클리의 통신원 자격으로 남북전쟁의 종군 화가로 일했고 잡지 삽화가로도 명성을 얻었다. 1860년대 후반부터 해양 주제에 심취해 해양전문화가의 길을 모색했다. 그는 당시 미술에서 생소한 분야이던 해양 주제를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1873년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도시인 매사추세츠주 글로스터의 어촌을 방문했다.
윈즐로 호머 ‘물팬’(1898~1899)
윈즐로 호머 ‘물팬’(1898~1899)
또 영국 북해 어업 커뮤니티인 컬러코츠에 2년 동안 머물며 어부들의 일상생활을 작품에 담는 등 창작활동에 필요한 실전 경험을 쌓았다. 1880년대 중반부터 1910년 사망할 때까지는 메인주 남부 스카버러 마을의 프라우츠 넥(곶)에 정착해 해변 풍경과 거친 파도를 주제로 한 해양화를 그렸다.

그는 열대바다 체험에도 도전했다. 바하마, 쿠바, 플로리다, 버뮤다 바다를 항해했고 수차례 걸프스트림(멕시코만류)을 횡단 항해하며 바다를 관찰하고 연구했다. 눈부시게 푸른 바다에서 자연의 거대한 힘에 맞서 도전하는 뱃사람들을 묘사한 두 작품의 배경도 열대바다다.

첫 번째 작품은 바하마의 흑인 어부들이 상어를 낚는 긴장된 순간을 포착했다. 작살에 찔린 거대한 상어가 몸부림칠 때마다 거센 파도가 일렁인다. 작은 배에 탄 흑인 어부들은 섬의 주민들로 영국인들의 농장에서 노동을 착취당하던 노예의 후손들이다.

호머는 카리브해를 항해하면서 흑인 상어잡이들이 거친 바다를 헤치며 상어를 잡는 장면을 목격했고 그 과정을 여러 차례 습작으로 남겼다. 그림 속 상어낚시는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경험을 토대로 그려졌다. 그 증거로 상어 몸체에 박힌 작살의 방향, 입을 벌린 채 헤엄치는 상어의 습성과 날카로운 상어 이빨이 해부학적으로 정확하게 표현됐다. 거대한 상어 몸체와 작은 배를 대비시키고 근육질로 다져진 흑인의 벗은 상체를 강조한 의도는 자연의 원시적 힘에 도전하는 인간의 실존적 투쟁과 불굴의 의지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림을 자세히 살피면 수채화 특유의 대담한 붓놀림과 종이에 스며든 투명한 물 번짐 효과를 발견하게 된다. 호머는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수채화 화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수채화가 해양 주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매체라고 판단하고 30년이 넘게 수채화로만 가능한 표현기법을 연구하고 실험했다.

고대 이집트에서 개발된 수채화는 수채 물감과 물을 사용해 채색하는 그림을 말하며 투명수채화와 불투명수채화로 나뉜다. 대부분 그림에 입문하는 초보자들이 휴대가 간편한 수채화로 기초 공부를 시작하기 때문에 유화보다 쉬울 거라는 선입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수채 물감은 사용하기 쉽지 않고 특히 투명수채화는 다루기가 더 어렵다. 투명수채화는 물감을 덧발라 그리는 방식인 유화와는 달리 한 번 색을 칠하면 수정하기가 어렵고 종이에 스며드는 물의 번짐이나 물감의 농도, 붓을 사용하는 방법도 무척 까다로워 숙달된 회화기술이 요구된다.

호머의 수채화는 기술적인 광택, 유동적인 즉흥성, 선명한 색채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준비단계의 그림으로 인식된 수채화에 대한 편견을 깨고 완성작으로 격상시킨 최초의 화가다. 호머의 가장 아름다운 해양화 중 상당수는 투명수채화로 그려졌다.

어부의 근육, 상어의 몸부림…수채화로 담아낸 미술계의 '허먼 멜빌'
다음 작품에서도 호머가 미국 최고 수채화가라는 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카리브해에서 젊은 흑인 남성이 양동이를 사용해 바다의 보석으로 불리는 산호를 열심히 찾는 장면이다. 화면에 스며든 투명한 물기와 자연광의 미묘한 변화, 그림자를 처리하는 방식, 물감이 흐르며 섞이는 번짐 효과, 눈부신 빛과 태양의 열기가 연상될 수 있도록 빠른 속도의 붓질로 여백을 남기는 표현기법에서 호머 화풍의 독창성이 느껴진다. 화가의 바다 체험과 밝고 투명한 수채물감의 효과가 결합된 호머의 해양화는 왜 그를 ‘미술계의 허먼 멜빌’로 부르는지 이해하게 한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